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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May 20. 2016

투정 부릴 수 없었던 삶

혼자 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


나라도 했어야 했다.

풍선 터트려 자유로운 영혼 되듯이

나라도 받아냈어야만 했다.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버텨내야 했던 삶

밑으로 꺼져갈지언정 옆으로 기댈 수 없었던 삶

머리에 인 광주리의 무게가 차고 넘쳐

나날이 땅으로 박혀야만 했었던 삶의 무게

     

광주리 안의 나와 오빠는

이리저리 쏠려 어지럼을 타면서도

안전하게 엄마 머리 위에 달려있었다.

     

하얀 머릿수건 위 까칠한 광주리 이고

넘어질 듯, 흔들리며 용케 중심을 잡아

참으로 참으로 훌륭히 혼자 달려온 길

     

투정은 없었다.

부릴 수 없었다.

받아줄 사람 없는 투정은 진작부터 힘  잃었으니...

선명한 튤립 세 송이

     

늙고 병든 육체와 억울한 삶 앞에서

엄마의 헐벗은 곡성을 투정이라 딱 잘랐다.

     

당신 삶의 불행으로

딸에게 이제 그만 투정 부리라고 단호했다.

     

힘들다고, 지겹다고  나는 해질녘  투정을 막았었다.

그러나 했어야 했다.

엄마의 투정을 받아내어 한번쯤 삶의 무게를 덜어냈어야 했다.

     

손이 되고 발이 되는 것만큼  중요한,

한 번쯤 떼쟁이 아이처럼 발딱 등 붙이고 사지로 땅을 치며

알맹이 인생 덩어리 내어놓으라고 함께 울었어야만 했다.

     

한 번도 투정 부릴 수 없었던 삶 속의

그녀를 꺼내어 너른 들판에 풀어놓았어야만 했다.

해질녘이라도 했어야 했다.

     

사랑은 사랑으로 받을 수 있으나

투정은 투정으로 받아낼 수 없었던 딸은,

유리 같은 이성과 판단이 오히려 죄가 되어

엄마를 투정 없는 삶 속에 영원히 가둬 놓고 말았다.



 몸져누운 지 5년째부터 엄마의 히스테리는 극에 달했다. 평생 경우 바르게 살아온 삶 속에서 아들을 강제로 빼앗고, 머리를 열게 하고, 배를 열게 하더니   걸음까지 앗아간 냉정한 삶을 향해 소리 높여 분노의 감정을 시시때때로 드러냈다.

'착하게 살아봐야 다 소용없더라'로 시작된 엄마의 한풀이는 일상이 되었고 슬픔을 지나쳐 참혹했다.

 아이 셋에, 직장생활에 주체하지 못할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병든 엄마의 수발은 나를 매우 힘들게 했다.

 육체적 고단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퍼런 칼에 상처 입고 그 아픔을 함께하고자 하는 엄마의 울음은 늘 쉰 목소리로  내 귓가를 할퀴었다.

 여유 없음이 죄였다. 조금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엄마를 편하게 해 드렸을 것이다.

 평생 오로지 홀로 삶의 무게를 감당해 온 엄마는 병상에서 나에게 투정을 부렸다. 아니 투정이 아니라 또 다른 엄마의 삶의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1년 동안의 휴직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아는 척을 했다.

 엄마보다 몇 배로 학교 교육을 받아 잘났다는  딸은  엄마의 심리를 얄팍한 지식으로 분석하려 했고, 결론에 다다르면 냉정하게  원인을 파악하여 자신의 힘듦을 과장하기에 바빴다.

 그냥 투정 부릴 수 있는 대상이 되어주기만 하면 될 것을, 그냥 ~네라고 공손히 대답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너무 어렵게 돌아서야 알았다.

 병석에 누운 10년 동안 엄마 속을 많이 애태웠을 것이다.  그깟 12년 병수발해 놓고, 힘들다고 나 좀 놓아달라고  너무 많이 드러냈다. 그래서 늘 치사랑은 내리사랑에게 생색내기 바쁜가 보다.

 투정 부릴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엄마 옆에, 그냥 온전한 지지의 눈빛으로 있기만 하면 되는데...

 모든 것이 안타깝기만 한  딸의 후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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