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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May 23. 2020

편두통! 우리 잘해보자.

 편두통! 너는 정말...

 느닷없이 내 시야를 가로막는 은빛 무리, 점점 커져 날아올라 눈꼬리에 콕 박혀 자리 잡으면, 모든 모서리가 허물어져 내린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다시 깜빡여보지만 이미 역부족이다. 형체들이 공중에 뿌려져 사라지면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너를 받아들인다.(이 현상이 편두통 환자에게 오는 전조증상이다. 전조증상 후 20여 분 뒤 극심한 통증이 찾아온다.)

 아무리 30년 지기라 한들, 지피지기한 지 이골이 났다 한들 너는 여전히 감당하기 버겁구나.

 

 초콜릿도, 와인도, 치즈도 손대지 않았는데, 햇빛에 노출되어 눈부시지도 않았는데 너는 기어코 다시 찾아왔구나. 나를 반성하는 중에도 눈앞의 모서리는 바삐 무너져 내리고, 야무지게 다시 떠보아도 파편들은 튕겨 반짝이는구나.

 그냥 그대로 공중에서 빛나라. 그 자리에서 요동치다 멈춰라. 제발 발광하는 채로 내 두상에 박히지 마라.

 

 그러나 나의 바람은 공염불이 될 줄 뻔히 알기에 어두운 동굴 속으로 침잠할 준비를 한다. 나에게는 묘약인 '나라믹' 정(트립탄 계열)을 목으로 넘기고 빛과 소음이 차단된 흑백 속으로 기어들어 간다. 웅크릴 수 있는 만큼 웅크려 나의 몸을 가장 작게 만들면 고통이 덜하리라. 나를 소멸시켜 두통을 박멸할 수 있다면 더더욱 웅크려 보리라.    

 찢어질 듯한 고통, 내장이 휘돌아 치는 듯한 메스꺼움, 눈알이 뼈져 나갈 듯한 통증은 여전히 익숙할 수 없구나. 너는 나를 곧 죽이리라.

 

 얼굴을 온통 찡그려 죽상을 만든다면 너를 짜내 버릴 수 있을까? 무엇을 방심하였을까? 연이은 전조증상의 반복은 혹시 모를 심각한 불행을 가져올 나의 건강 이상 징후일까? 두렵고 무섭다. 이대로 침대 속으로 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 될 대로 되어라. 니 맘대로 하여라.   

 

 눈앞의 빛들이 사라지고 형체의 모서리들이 살아나면 극심한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숙면에 빠져든다.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편두통도 지나갔다. 날 쥐고 흔들다 그래도 제 자리에 가져다 놓았으니 얌전히 지나갔다고 감사라도 해야 할까? 이제 서서히 일어나 뭐라도 먹어야 한다. 머리가 흔들리고 기운이 하나도 없다. 거울을 보니 엄마가 늘 하던 말처럼 눈이 십리는 쑥 들어갔다. 예전처럼 모든 것을 게워내지는 않았다고 위로를 삼아야 할까?

우리 잘해보자!

 다행히 토/일요일에 찾아와 준 것 또한 감사한 일이다. 30년 가까운 교직생활 중 나의 병가 사유에는 단연코 편두통, 너만 적혀 있었으니(지난번 수술 빼고) 정말 너는 나를 놓지 않는구나. 수업 중 편두통이 찾아오면 조퇴에, 병가에... 다음날부터 빠진 수업 보강하느라 다시 몸살이 날 지경이니 정말 너는 징글징글 내 곁에 머물더구나.

 아주 오래전 대학병원 신경과 전문의가 말했었지? 50이 넘으면 괜찮아진다고... 언제 그 나이가 되나 싶어 고통으로 암담했는데 정말 50이 넘으니 넌 정말 순하게 오긴 오더구나. 고맙게도 아주 드문드문....

여성 호르몬이 너를 요동치게 한 거니? 괴롭히기라도 하는 거니?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너를 찾아(검색) 나선다. 여전히 너를 원인 모를 21세기 불치병으로 간주하더구나. 무즙, 국화차, 보톡스, 한의원, 수지침 등을 가까이하고 너에 관한 일기까지 써가며 너를 알기 위해 노력했던 30여 년 세월들! 손길 뜸했던 '편두통이 싫어' 카페도 클릭해 보았다.

출처-홍혜걸의 의학 채널 '비온뒤'

 홍혜걸 유튜브 채널에 서울 삼성병원 정진상(편두통 신경과 명의이자 편두통 환자인) 교수가 나와서 너의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하더구나. 나와 같은 많은 이들이 다는 확인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미국 의료 채널이 짐작해 만들었다는 전조증상 모습은 속이 뻥 뚫릴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내 마음을, 내 증상을 알아준다니 정말 고마웠다. 

출처-홍혜걸의 의학 채널 '비온뒤'
 정진상 교수가 말했다. 민감한 뇌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세상에! 나는 어찌하여 뇌혈관이 확장 수축할 정도로 뇌까지 민감하단 말인가? 섹시한 뇌를 소유한 스마트한 이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센서티브한 뇌를 가진 까칠한 이가 되어 너랑 평생 친하단 말이냐?
출처-홍혜걸의 의학 채널 '비온뒤'

 마음으로나마 뇌를 달랠 수 있다면 노력하리라. 나이에 걸맞은 푸근한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며 느긋하게 풀어져 보리라. 꽃피는 5월에 여러 번 찾아온 너를 잘 달래 보리라.

 지갑 속에 언제나 들어있는 편두통 약을 믿는다.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으로 너를 받아들인다. 나에게 크나큰 은혜(엄마와 마지막 인사)를 베푼 적이 있기에 너를 증오할 수만은 없겠지.

 5월의 햇살처럼 따스한 눈으로 주변을 보리라. 추위에 옥죄던  마음 풀어지게 온화해지리라.

 

 그러면 좀 더 천천히, 좀 더 약하게, 좀 더 더디게 와 줄 수 있는 거니? 어차피 나에게 올 수밖에 없다면 말이야. 

우리 이제 잘해보자. 헤어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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