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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내 집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집


그래. 이제는 임시로 살지 않으리라. 그런 다짐으로 작은 부분이라도 집을 고치고 가꾸기 시작했다. 여전히 남의 집이라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제는 똑같이 2년을 살면서도 임시 인생을 산다는 슬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대만족이다.
내 소유가 아니어도 이곳은 내가 사는 내 집이고, 비록 임대라 할지라도 이곳에서 풀어가는 내 인생은 결코 임시가 아니다. p209
내 집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집입니다, 박윤선


내 집 장만의 꿈이 이번 생에서 멀어지고 있을 시절, 제목만 보고 홀린 듯이 집어들었던 책이다. 책의 내용은 비록 1인 가구도, 싱글도 아닌, 두 사람 몫의 생활이 더 끼어든 내 삶에 적용하기에는 괴리가 있었지만 이 구절만큼은 당시의 나에게 꼭 와닿는 이야기였다.


내 집으로의 입주를 기다리며 다섯 번째 전세를 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2년 뒤면 비워 주어야 할, 거꾸로 말하자면 짐을 싸 떠나 버리면 그만인 남의 집일지언정, 나는 이사를 온 뒤 단 하루도, 아침이면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이면 바닥에 오랜 얼룩이 생기지 않도록 걸레질하기를 빼먹지 않았다. 내 돈을 들여 희뿌옇던 유리창을 닦아 놓으니 멋진 경치를 십분 감상할 수 있어 매일이 행복했다. (유리창을 닦았다는 말에 펄쩍 뛸 줄 알았던 남편도 투명해진 창 앞에서 가성비에 만족해 했다.)

내 취향에 맞지 않는, 펄감이 있는 시커먼 대리석 상판 위에는 다양한 색감의 천을 깔아 다른 분위기를 내기도 하고, 누수를 점검하느라 양쪽으로 길게 칼집을 낸 벽지 위에는 식물이 그려진 액자를 놓아, 훤히 드러난 콘크리트 벽을 가렸다. 쨍한 원색으로 칠해져 처음에는 거슬렸던 문짝들도 아이가 그린 그림들을 붙여두니 멋진 프레임의 액자가 되어, 나만의 소장용 갤러리에 온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긍정한다. 내 소유가 아니어도 이곳은 내가 사는, 나의 집이다. 나라는 사람을 충실히 반영하는, 반대로 나라는 사람을 '형성해 온' 공간이기도 하다. 외모나 옷차림, 몸매. 단지 그뿐일까? 성인이 된 개인은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통해 설명되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공간, 검소함과 소박함을 품고 있는 공간,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성격을 드러내는 공간, 반대로 언제든 누구든 부담없이 들러 가라는 듯,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물건들이, 그 헝크러짐이 인간적으로 느껴지는ㅡ엄마 집 같은ㅡ따뜻한 공간도 있다. 비단 가정집 뿐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 식당, 꽃집, 옷가게.. 우리가 들고 나는 무수한 공간들 속에는 그 공간을 가꿔온 사람의 내면과 가치관이 묻어 있기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 소유가 아니어도, 내 집은, 나의 공간이다. 내 집에 입주하는 날까지, 이 곳에서의 행복을 유보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쓰러져 간다고 표현한 '썩다리' 아파트, 재건축과는 무관한 스무 평 짜리 '전세'집이라도, 탁 트인 씨티 뷰의 낭만이 있고 깨끗한 주방과 화장실도 있으니 세 식구 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남아 있는 계약 기간도, 부지런히 쓸고 닦으며, 행복하게 살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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