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산주공 8단지의 마지막 봄
정의.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있는 공동 주택 단지
건립경위. 1983년 12월부터 1991년 5월까지 실시된 철산택지개발사업은 쾌적한 주거 환경을 갖춘 서울의 위성 도시를 개발하기 위한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러나 광명시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구역에서 제외됨에 따라 광명시가 독자적으로 광명시종합개발계획을 세워 광명시 철산동 일대의 자연 녹지 114만 2,000㎡를 택지로 개발하여 8,200가구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고 광명시청, 광명경찰서, 학교 등 공공시설 및 상업 업무 지구를 조성하였다. 광명시는 철산지구를 인근 구로공단과 연결시켜 직장과 주거시설을 가까이 배치하는 직주근접(職住近接)의 계획적인 신시가지로 개발하였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타운하우스형 저층 주거동 아파트들은 30여 년의 시간을 지나며 각 세대 별로 취향에 맞게 꾸며둔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조만간 재건축에 들어갈 예정인 지역이지만, 1980년대 중반 공동주택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 기억되며, 기억할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출처_네이버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우연이었다. 타이어를 갈기 위해 가까운 양평점 대신 광명의 코스트코로 장을 보러 가던 주말, 봄이었다. 평소 잘 다니던 길마저 밀려 큰 도로를 빠져나와 광명 시내의 작은 도로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높은 용적률을 뽐내며 하늘로 솟아오른 재건축 단지와 공사장 부지 사이, 요즘 보기 힘든 저층의 아파트 단지가 눈에 띄었다. 좀 더 가까이 가니 파란색 동그라미에 흰 집이 그려진 마크를 달고 있는, 주공아파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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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하순. 우리 동네 벚꽃은 이미 다 떨어졌을 무렵이었는데 유독 이 단지에 심어진 커다란 나무들은 가지마다 한창 굵고 탐스런 분홍 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말이라 카메라도 챙겨 나온 참이었고, 꽃이 보고 싶으니 잠깐 들러 가기로 했다. 잠시 후, 꽃 구경에 전혀 뜻이 없는 남자들을 차에 두고 카메라를 챙겨 내린 나는 깜짝 놀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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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크게 놀란 것은 두 가지 이유였는데, 첫번째는 대부분의 집에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느낌이라는 것과 두번째로는 사람도 거의 살지 않는 단지에 커다란 카메라, 반사판, 촬영용 모델까지 대동한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여기 혼자 온 건 나 뿐인 것 같아 살짝 머쓱하기도 했지만, 이미 SNS의 명물이 된 듯한 이 공간을 천천히 둘러 보기로 했다.
단지 안쪽으로는 이마를 마주댄 큰 벚나무들이, 바깥쪽 경계를 따라서는 아파트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수령의 겹벚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땅값이 비싼 서울 근교에는 더 이상 지어지지 않는 저층의 아파트와 그 벽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은 멋진 인생 사진의 배경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동 간격이 넓직한 건물 사이 뜰에는 관리되지 않아 마구 자라난 잔디와 잡초들 사이 이름 모를 보랏빛 야생화 군락들이 흐드러져 풀밭에 안기듯 앉아 있는 모델 아가씨의 잔꽃무늬 원피스와 참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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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나에게는 모델도 없고, 내 카메라는 자랑할 만한 사양도 아니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떨어질 만개한 벚꽃과,역시 재건축이라는 시한부의 생을 앞둔 오래된 아파트의 마지막 모습을 담기 위해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씩씩하게 단지를 누볐다.
멀리서 바라본 오래된 단지는 세월의 더께를 뽀얗게 뒤집어 쓴 채 콘크리트 더미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인 듯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조금 느낌이 달랐다.
무엇보다 동마다 차별화를 둔 설계가 인상적이었다. 주택처럼 일 층으로 따로 현관을 낸 집도 있었고, 타운 타우스처럼 계단 양 쪽으로 세대가 나란히 붙은 구조도 있었다. 다양한 가족 구성과 취향을 고려한 듯, 조금씩 설계를 달리하면서도 각 층의 처마에 같은 자재의 지붕을 올림으로써 공동 주택의 통일성을 지킨 듯했다. 콘크리트로 지은 아파트에 기와 지붕이라니, 독특했다. 청색 또는 탁한 주홍색의 기와 지붕은 무채색의 아파트에 색감을 더했다. 녹슨 수도 배관과 난방 시스템은 수명을 다 했을 지 몰라도, 아파트의 설계만큼은 세월을 거스르는 '멋'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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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으로는 화려한 인테리어와 감성을 뽐낼지언정 현관 문을 닫는 순간 몇 천 세대가 넘는 집이 똑같아지는 요즘 아파트와도, 교외의 타운 하우스라고 하지만 같은 틀로 찍어낸 듯한 일란성 쌍둥이 같은 집들과도 다른 비 정형의, 통일성 없음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와 '철산주공'이라는 태그로 sns를 검색해 보았다. 이미 올 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다녀갔고 많은 기록과 감상을 남긴 뒤였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그 공간을 찾았다. 어떤 이들은 벚꽃 명소로, 어떤 이들은 이국적인 배경을 찾아다니는 출사(出寫)로. 신기한 것은 모두가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것은 아닐 텐데도 대부분이 8-90년대의 오래된 아파트와 그 속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년 봄, 겹벚꽃이 다시 흐드러지기 전 시작될지 모르는 철거 작업에 사람들은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오래된 장소의 사라짐을 아쉬워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KTX와 여러 간선 도로들이 개통하면서 사통팔달의 요지이자 서울 근교인 광명의 집 값이 치솟고, 이미 높은 시세를 형성한 주변 신축 단지만큼 재건축을 코앞에 둔 이 단지도 몇 억쯤은 몸값이 올랐다고 한다. 대출을 잔뜩 끼고, 다 쓰러져가 들어가 살 수도 없는 집을 산 주인들은 하루 빨리 이 동네에 공사중. 이라는 펜스가 쳐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집을 한 채라도 늘려 분양해야 이익이 될 건설사에서는 불과 몇 년 안에 이 작고 납작한, 지나치게 띄엄 띄엄한 건물들을 가능한 초 고층의, 해가 들 정도로만 간격을 띄운 아파트 숲으로 쉽고, 빠르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개인의 사적 소유권, 기업이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이윤 극대화. 소유권도, 개발권도 없는 외부인의 아쉬움이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오늘 찍어온 사진들을 천천히 들여다 보면서, 이 자리에 새롭게 지어질 집에도 그 속에 살아갈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 공공 건축 뿐 아니라, 수도권의 온 땅을 뒤덮어가는 '아파트' 건축에도 조금 더 이 도시를 조화롭고, 다채롭게 하려는 시도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잠시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