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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30. 2020

맹모삼천지교

목동에 이사를 온 지 일 년이 되었다. 아이는 이제 곧 여덟 살이 된다. 내가 드디어 학부형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이가 곧 초등학생이 된다는 것을, 나도 이제 학부형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멀리 두고 온 나의 이웃들이었다.


"주원이 어머니, 잘 지내시죠? 안부 궁금해서 연락 드렸어요." 안녕히 계시라는 마지막 인사가 바로 위에 뜨는 것을 보니 꼬박 일 년만의 연락이었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안녕하세요! 연락 주셔서 반갑고 감사해요. 모두 건강하시죠?" "네. 실은 저희 곧 목동으로 이사가요. 단지를 추천해주실 수 있으세요?"


안부와 근황 묻기로 운을 띄운 연락은 이후로도 몇 군데서 더 왔다. 시작은 다양했다. 새삼스럽게 아이가 보고싶다거나, 꽤 신선한 인삿말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용건은 하나였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군지인 목동으로 먼저 이사한 맹모(孟母)의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랬다. 나는 남다른 학구열로, 누구보다 발빠른 타이밍에 외곽 신도시를 탈출해 학군지로 입성한 맹모가 되어 있었다. 최근 이 년 사이 더 가파르게 값이 오른 서울의 아파트를 매입해 제테크에 성공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사를 나오며 일일히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은 내 탓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최대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제공하려 애쓰는 동시에 우리는 집을 산 것이 아니라 이십 평 아파트에 세를 얻어 살고 있으며 신도시의 새 집보다 저렴한 구축 아파트를 찾던 중 친정 근처로 오게 되었음을, 이제 곧 일 년 뒤면 학군과 상관없는 동네로 다시 떠나게 될 예정임을 차근차근 설명하려 노력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유,초,중,고를 졸업하고 그리고도 십 년을 더 이 동네에 살았으면서도 동네에 맛집 하나 제대로 없다는 사실에 불평만 했지 그 이유가 건물마다 빼곡히 세를 얻어 들어찬, 그러고도 장사만 잘 되는 학원들 때문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이 동네에서는 근사한 레스토랑보다는 아이들이 학원 시간 짬짬이 끼니를 때울만한 토스트 가게나 김밥집이 오래 살아 남았다. 앵겔 지수라는 용어가 있다면 이 동네에는 생활비에서 사교육이 차지하는 비율을 표현해 줄 어떤 신조어가 필요해 보였다.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동네의 낡은 건물들을 올려다 보았을 때, 깨달았다. 여기가 바로 학원의 천국이었다.

투자라는 측면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대치동이나 강남이 이미 넘볼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라면 목동은 그보다 쉬이 접근이 가능한 학군지이면서도, 재건축이라는 호재를 남겨 둔 차선의 좋은 선택지였다.


크지 않은 동네 안에서도,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학교는 정해져 있었다. 수십 억을 호가하는 주상복합 인근 학교들이 그랬고, 인근의 다세대나 빌라에 사는 아이들을 포함하지 않는 학군이 그랬다. 이제 막 걷고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넘치는 사교육의 기회와 혜택을 누리는 것이 당연했던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해갈 것이었다. 비록 오래 전 일이지만, 이곳에서 학교를 나오고 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나로써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네 살이 되던 해, 오빠가 초등학교 이 학년이 되던 해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고척동의 안락한 삼십 평대 아파트에서 집을 줄여 이사하자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불만이 많았다고 했다. 몇 년만에 겨우 장만한 내 집을 두고 어째서 빚까지 지면서 더 좁고 불편한 집으로 가야 하느냐는 생각은 합리적이었다. 반면, 엄마는 맹모(孟母)였다.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자식 교육이 우선이었다. 당시 고척동의 우리집 옆에는 교도소가 있었는데 엄마는 도저히 교도소 곁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아빠는 교도소가 곧 이전할 예정이라며 엄마를 달랬지만 이미 신시가지의 학군을 마음에 둔 엄마의 확고한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엄마의 선택은 옳았다. 지난 추석, 고척동으로 추억 여행을 떠난 부모님과 오빠는 이전 예정이라던 교도소가 이십 삼 년을 더 머물다 떠나간 자리에 이제서야 건물이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삼십 년이 흘렀어도 동네는 예전 그대로였고, 우리가 약간의 빚을 지고 이사를 나올 때만 해도 큰 차이가 없었던 고척동과 목동의 집값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졌다. 맞벌이 월급쟁이로 평생을 살면서 돈 버는 일에는 어두웠던 엄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공한 부동산 투자였던 셈이다. 아들과 딸도 (딸은 모르겠지만)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어쩌면 엄마는 그 또한 이 동네가 준 선물이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새 집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이 배어 있는 그 집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지도.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은다는 뜻의 부동산 신조어)'을 해서라도 목동에 오겠다는 아이 친구 어머님의 각오는 비장했다. 그녀도 맹모(孟母)였다. 삼십 오 평의 신축 자가 아파트를 두고 십 팔평의 단지 아파트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그 단지 아파트의 벽면에는 요즘 '재건축은 언제 시켜 줄 거냐, 집에 물이 샌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돈을 모아 현수막은 붙일지언정 모두가 안다. 줄줄 물이 새고 안전에 취약하다는 엄살을 아무리 떨어 보아야 재건축은 십 년안에 삽이나 뜰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이도 이미 영어 유치원에 다니며 경쟁의 워밍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친절하게 겁을 주었다. "여기서는 영어 유치원을 다니면서도 원어민 과외를 받는답니다." 아이를 키우기에는 편리하고 살기 좋은 동네라고도, 낡은 아파트에 대해서는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친절하게 조언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불친절한 고민의 여지를 남겨 주었다. 가장 좋은 단지, 가장 좋은 학교를 고민하는 그녀에게 말이다. "아이가 경쟁을 통해 더 나아갈 수 있을 지, 경쟁 때문에 힘들어할 지는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니 한 번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고려하시는 학교는 동네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는 맞지만 생각하신 것 이상으로 경쟁이 치열할 수 있거든요."


그건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했다. 나는? 나는 맹모가 될 것인가? 이제 겨우 마련한 내 집을 팔아 치워서라도 중차대한 순간이 오면 학군지의 전세를 구하게 될까? 그래야 할까?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단계를 지나 이제 나는 어떻게 엄마 노릇을 해야 할까. 나는 맹모가 아니고, 내 아이는 맹자가 아니다. 어떻게 해야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으며 아이는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을까. 어떤 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 우리를 흔드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말은 쉽지. 정작 내 아이가 경쟁에서 낙오하고 뒤쳐지는 순간이 오면 나는 얼마만큼 객관적이고 냉정해질 수 있을까. 초등학교 입학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분명 이것만큼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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