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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30. 2020

주택 청약에 당첨되다

2017년. 초강력 부동산 대책의 약효를 기다리며 우리는 네 번째 전세 살이를 시작했다. 같은 단지에서도 천 만원이라도 깎아 주겠다는 집을 택하고, 금리는 낮아도 자유로이 입출이 가능한 통장에 목돈의 현금을 남겨 둔 것은 곧 적당한 가격에 내 집을 장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전세 살이를 전전하던 우리의 종잣돈이 되어 준 남편의 퇴직금은 그가 수 년간 땀흘려 일한 노동의 댓가였다. 그런 남편에게 그 돈의 가치에 걸맞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내 가족이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공간, '내 집 장만'이라는 숭고한 목표 뿐이었고 행여 한 푼이라도 날려버릴까, 혹여 집을 사야 할 타이밍을 놓쳐 버릴까 두려웠던 겁 많은 부부는 꽤 수익이 난다는 펀드나 채권에도 목돈을 넣어보지 못한 채 형편없는 금리의 저축예금을 손에 들고 하염없이 부동산 어플에 접속하며, 올라버린 집값이 내리기만을, 내려가기만을 기다렸다.


결말은 예상대로. 고분고분 집값이 잡혀 주리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한 것이었으며 '사야 할(to buy)'집 대신 '살아갈 (to live) 집'을 정답으로 고른 우리의 선택도, 보기 좋게 틀렸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전세 살이는 이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불과 일 년여 사이, 누구나 살고 싶어할 조건의 집은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고, ‘살’ 수는 있었지만 살고 싶지는 않아 주저했던 집들마저 매주 가뿐히 신고가를 경신하며 거만했던 우리를 비웃었다. 통장에 고이 간직한 현금은 금액 그대로였지만, 서울의 집값이 두 배, 세 배로 오르는 동안 어째서인지 그 큰 돈의 가치는 점점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서울에, 내지는 출퇴근이 가능한 수도권에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분양가에 상한 제한이 있는 '주택청약'에 당첨되는 것. 그것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뽑기 운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살면서 당첨되어 본 것이라고는 동네 슈퍼의 개점 행사에서ㅡ시침과 초침을 핑킹 가위로 오린 것 같은 지그재그 무늬의ㅡ벽걸이 시계(90년대의 평범한 가정집에는, 나누어 준 곳은 다를지언정, 이 시계가 유난히 흔했다.)를 하나 공짜로 받아본 것이 전부였다.

이미   ,  아이를 낳으며 자연스럽게 정착을 고민하게  우리 부부도 주택청약을 하나 , 넣어보기 시작했었다.  집이  집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줄을 서서 모델하우스를 둘러보는 수고마저 설레고 즐거웠지만 기본 10 1, 때로는 4 1 경쟁률도 뚫지 못하고 맥없이 탈락하고  뒤에는  집도  집은 아니겠거니, 마음을 비우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랑 외동 아이 하나뿐인 우리 가족은 청약 제도가 선호하는 구성도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도합 서른 번에 가까운 청약 추첨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내 집 장만의 꿈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남편은 후회인지 화병인지 모를 속앓이를 하며 잠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대놓고 서로를 원망하는 일까지는 없었지만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그때 그 집, 살 걸 그랬어."라는 말을 꺼낼 때에는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이듬해 여름, 우리는 교통이 불편하고 역세권도 아닌 외곽 지역, 아파트도 아닌 연립 등기의 복층 집들을 둘러보고 다녔다. 온 동네 집값이 다 오르는 동안에도 그 동네 집값은 그닥 오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를 일이 없어 보였다. 초등학교가 가까워 마음에 들었고 옥탑이 있어 빨래도 잘 마를 것 같았다. 듬성듬성한 산등성이에는 무덤이 바라보였지만, 내 집이 되어준다면 모른 척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이는 계단이 있는 집을 마음에 들어하며 신이 났다. 나는 우리의 형편에 맞는 그 집을 사자고 말했다. 남편도 내 결심에 함께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오랜 고민 끝에, 나보다 조금 더 현실적인 아이 아빠가 나를 말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2019년의 봄. 서울도 아닌 수도권 택지지구 청약에서도 떨어지고 난 뒤였다. 이제 남편은 모델하우스 구경은 커녕, 부부 간 상의도 없이 기계적으로 추첨에 응모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어차피 안 될 텐데 뭐. 우리는 더이상 당첨 사이트에 접속하는 일도 없었다. 당첨이 되면 문자가 올 텐데. 문자가 오지 않으면 확인할 필요도 없이 떨어진 것이었다. 출근길인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뭐라고? 나 지금 바쁜데. 뭐라고 했어?"


우리가 됐다고 했다, 당첨이.




나는 어디에 뭐가 됐다는 것인지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남편도 사정은 비슷했다. 마감 직전이었고, 이번에도 될 것 같지도 않은데, 다 싫다. 하지 말아버릴까, 유난히 그런 날이었다고 했다. 아예 청약으로 집 장만할 생각을 관두려던 참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도, 경건한 마음으로도 되지 않던 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구나. 얼떨떨했다. 몇십 번 만의 도전에 처음으로 받아본 문자는 당첨을 축하한다고, 언제까지 견본주택을 방문하시고 언제까지는 계약금을 입금하시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남편은 회사에 연차를 내고, 아이는 유치원을 빠지고, 아무래도 좋았다. 어렵사리 얻은 이 기회를 놓칠새라 우리 가족은 열일을 제쳐둔 채 모델 하우스로 달려갔다.

어떻게 생긴 집인지 둘러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정말 내 집인 거였다. 내 집이 될 수도 있는 집이 아니라, 정말 이렇게 지어질 내 집이었다. 수도꼭지 하나도 허투루 보아지지가 않았다. 그 해 여름, 가건물인 모델 하우스가 철거되기 전까지 우리는 고양시의 우리집에서 견본 주택들이 모여 있는 서울 한복판으로 수없이 들락거렸다, 힘든 줄도 모르고.


서류 작성을 도와 주었던 데스크의 직원은 우리의 주소를 보고 놀라워했다. 경기도에서 오셨느냐고, 그녀는 몇 번이나 되물었다. 우리가 청약한 집은 서울이라기엔 무안한 끄트머리이긴 했지만 그래도, 서울이었다. 크지 않은 세대, 가점 물량을 제외하고, 거기에 당해 지역인 서울 거주자를 제외하고 나면, 그야말로 몇 되지 않는 자리에 우리가 당첨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공택지라는 특수성 덕분에 분양가도 시세보다 턱없이 저렴했다. 물론 대출을 받아 갚아 나가야 하겠지만, 가파르게 오른 시세를 쫓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형편에 이보다 훌륭한 조건의 주택 구입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부동산 표류기는 끝이 났다. 부동산 투자야말로 불로소득이라고 비난했던 우리도 결국 그들과 다름없는 주택 보유자가 되었다. 약간의 마음 고생 외에는, 아무 노력 없이 말이다.

거창하게 써붙인 '표류기'라는 이야기의 끝은 결국 이 미친 세상과 싸워 이겼다는 결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토록 미워했던 세상이 도도하게 던져 준 마지막 동앗줄을 덥석 잡을 수 있었다는, 부끄러운 고백이다.


황무지였던 땅에 아파트는 벌써 골조를 올렸고 이제 일 년 뒤면 나도, 생애 첫 ‘내 집’에 입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대출이 잔뜩 끼어 있는 내 집이 날로 값이 오르기를 바라게 될런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흘러갈까?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집이 없는 사람은 집값이 내려가기를, 집이 있는 사람은 집값이 오르기를, 적어도 형편없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리라는 것. 어쩌면 그러한 바람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간의 욕망은 부정한다거나 계몽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닐 테다. 우리 모두의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렇기에 적당한 균형을 지켜 주는 제도인지 모른다. 모두의 바람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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