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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이사하는 날

결혼 후 7년 간 이사만 4회차 인생. 이삿날의 아침 풍경은 이미 익숙하다. 처음 이사를 하던 해에는, 여덟 시까지 온다고 했는데 일곱시 몇 분부터 딩동 하고 들이닥치는 사람들에 놀라 황급히 옷을 주워입고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돌아다녔다.

정말 그랬다. 처음에는 미리 챙겨두지 못해 이사 당일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이삿날에는, 이사를 들어오는 사람들과 이사를 나가는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인다. 돈을 돌려받아야, 돈을 낼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이어달리기의 성패처럼, 돈의 흐름이 연결고리처럼 맞물려 속을 썩인다.

언젠가 한 번은 이삿짐을 넣기 전 몇 시간을 이용해 도배를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찬 가을이었는데. 그 날 하루에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당시 살고 있던 집의 보증금을 빼서 우리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어야 했던 집주인은 열 두시가 지나도록 집주인의 '집주인'에게서 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었고 덕분에 이사갈 집의 잔금을 치르지 못한 우리도 이삿짐을 모두 싸들고 도착한 빈 집 앞에 벌을 설 뿐, 도배는 시작할 수 없었다. 일이 틀어지자 오 분 간격으로, 피를 말리는 독촉 전화가 계속해서 걸려오기 시작했고 더는 못 기다린다, 그냥 가시겠다는 도배장이 어르신들께 두 시간 째 사정을 설명하며 인내심을 잃어가던 나는 결국 인생에서 몇 없을, 스트레스 과다로 인한 흑역사 한 장면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나야 도배 어르신들에게 시달리든 어쩌든. 내 감정의 영문을 알 턱이 없는, 은행에서, 우리에게 내어줄 보증금이 입금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젊고 상냥한 집주인 부부에게 화산이 폭발하듯 맥락 없는 역정을 낸 것이다.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부끄러워 기억에서 지워 버린 모양이다.

그 뿐이랴. 2년 전 삼송으로 이사를 올 적에는 집주인이 보증금을 수표로 돌려주는 바람에 우리가 보낼 금액과 맞지 않아 애를 먹었다. 판교에서 삼송. 경기 남부에서 경기 북부라는 꽤 먼 거리를 정신 없이 달려오고 있었던 우리는 몇 없는 '스탠다드채터드' 의 지점을 찾아 화정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건물로 들어가는 지하 주차장 앞에서 끼익, 차를 세운 남편이 핸들을 놓고 뛰어간 뒤 조수석에 있던 내가 건너가 주차를 했던 기억이 난다.

2019년의 이사는 순조로웠다. 우리도 제법 베테랑이 된 것일 테다. 이사를 나가기 2주 전에는 관리사무소에 들러 전출신고를 하고, 이사 전날 다시 한 번 들러 신고가 잘 되었는지 확인한다. 당일에는 장기수선 충당금을 챙기고, 관리비를 정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남편은 부동산에서의 일들을 나이스하게 마치고 금세 돈을 챙겨 나왔고 그 사이 나는 이삿짐이 빠지고 난 집의 하자들을 점검해 두었다. 이삿날 상하거나 방해가 될 만한 짐들을 미리 포장해 둔다든지, 냉동실의 유물들을 정리해 간결하게 남겨두는 것도 빠른 이사에 도움이 된다.

열 한시 쯤, 주원이에게 인사를 하러 태윤이가 들렀다. 주원이는 이미 할머니댁으로 간 뒤였지만 내가 대신, 작별 인사를 했다.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태윤이를 한 번 꼭 끌어안았다.

305호였던 우리집의 꽤 가까운 이웃이었던, 303호 지혁이네 문고리에도 작은 카드와 할로윈 사탕을 걸어두었다. 직장생활로 몇 번 뵙지는 못했지만 늘 친절하셨던 지혁이 어머님, 저녁 헬스장에서 날것의 모습으로 자주 뵈었던 호탕한 웃음의 아버님, 등,하원길 놀이터에서의 시간을 함께했던 지혁이 할머님까지. 보기 드문 화목한 대가족이셨다. 모두 건강하시기를.

관리사무소와, 아침을 해결할 토스트 가게 사이를 오가는 사이 단지 내 어린이집에서 할로윈 코스튬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 나온다. 사탕이 가득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고서. 나는 이른 아침 시간에 단지 내를 걸어다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어서 오며 가며, 두툼한 사탕 주머니를 두 개나 얻었다.

뛰노는 아이들. 가운데 멋진 마법사가 된 예서네 동생도 보인다. 익숙하고도 정겨운 단지 풍경을 마지막으로 열심히 눈에 담는다. 남편과 톡을 주고받는다. '기분이 이상해.' '나도.' '우리, 여기서 너무 잘 살았어.'


우리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 준 삼송마을. 안녕. 친절하고 따뜻했던 모두에게, 안녕. 고마웠어요. 목동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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