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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가사는 적성에 안 맞아.

30대의 기록 #1 초보 제빵사

2016년. 부모님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 하고 전업 엄마로써의 삶을 다시 시작했다. 마침 남편 회사가 사옥을 이전했고, 전세 만기도 다가왔기에 회사 근처로 전셋집을 다시 구했다.


친구도 가족도 아무 연고도 없는 동네에서 그나마 요긴했을 사회성조차 갖추지 못한 나는 아이와 둘이서 말 그대로 동동거리며 남편의 퇴근만을 기다렸다. 아이가 기관 생활을 시작하며 아홉시 반부터 두 시까지의 자유 시간이 생겼지만, 딱히 갈 곳도 없었고 아무 의욕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나와 다르게 의욕이 넘치는 남편이 집 근처 복지관에 나 같은 주부들을 위한 저렴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는 걸 찾아냈고, 그 다양한 프로그램들 중 나는 절대 마감되지 않을 것 같은 3개월 짜리 왕초보 베이킹 교실을 수강하게 되었다.




큰 의욕 없이 시작한 복지관 수업은 의외의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세 달을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구움과자, 파운드, 단팥빵, 발효빵, 쇼트케이크 등 기본적인 것들을 배웠다. 실습하고 온 다음 날이나 주말 동안 배운 대로 다시 만들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하다가 어려운 점이 있으면 선생님께 사진을 찍어 문자로 여쭈어 보기도 했다.

이 만 얼마를 주고 노브랜드 거품기도 장만했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결혼할 때 전자레인지 대신 꼭 광파 오븐을 사라고 입이 닳도록 조언해 준 동갑내기 직장 선배가 문득 고맙다. 오븐이 없었으면 복습도 없고 빵도 없었을 테다.


등을 떠밀려 가까스로 복지관이라는 문턱을 넘은 나는 같은 건물에서 곧 운동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다. 아줌마들이 모여 운동하는 집단에는 으레 텃세가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줌마들은 일단 시작하면 3년, 5년은 기본이기 때문에, 그 꾸준함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할 지 모른다.)

처음 배우는 기구 필라테스에 몸 개그의 향연을 펼치고 있던 나와 달리, 가늘고 선이 예쁜 팔 다리를 가졌던 그녀는 어떤 자세든 곧잘 따라하는 우등생이었다. 더구나 그녀는ㅡ역시 나와 다르게ㅡ낯선 사람에게도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넬 줄 아는, 친절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한 시간 내내 선생님의 집중 마크를 받느라 부끄러웠던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엉겁결에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되었고, 몇 개의 교차로와 건널목을 지나며 우리가 같은 목적지로 걷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적이 드물었던 그 동네에서 공교롭게도 같은 단지에 살고 있다는 것, 비슷한 또래에, 동갑내기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 두 가지 공통 분모를 가진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임이 엄마. 그녀는 이름도 모습처럼 깨끗하고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 역시 누구 엄마 대신 꼬박꼬박 내 이름을 불러 주었기에 나도 주로 단아 씨 라고 불렀다. 생일이 일 년도 차이나지 않는 또래였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놓자고 하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서로를 존대하며 지낸다.

또 다시 갑작스런 이삿짐을 싸기까지, 일 년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단아씨는 우리 집에 정기적으로 자연란(농장에서 직접 키워 한두 알씩 모은 귀한 달걀)을 선물했다. 나는 그 귀한 달걀로 빵과 과자를 만들어 종종 돌려 보냈다. 처음에는 달걀로 시작했던 우리의 물물교환은 집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나누어 먹는다거나, 여행을 떠나도 서로의 선물을 챙기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달걀이 깨지지 않도록 달걀 모양으로 만들어진, 신기했던 락앤락 용기가 우리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동안, 우리의 정도 서서히 쌓여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나의 첫 육아 친구, 엄마 친구였다. 그 겨울이 오기 전까지, 치열하게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수험생활을 이어오던 나에게 전업 엄마로의 태세 전환은 마음 먹은 대로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늘 긴장해야 할 것 같았고, 뭔가를 놓치고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우울하고 불안했다.

단아씨와 일주일에 세 번씩, 복지관에서 운동을 하고 동네를 걷는 것.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상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쌓여간 평범한 날들이 분명 내 삶에 남아있었던 긴장을 풀어주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사소한 선물의 힘과 가치도 배웠다. 단아 씨가 일년 내내 챙겨주던 달걀은 슈퍼마켓에서도, 유기농 식품 전문 매장에서도 살 수 없는 어떤, 마음이었다.

나는 이후에도 종종 빵을 배우러 다녔고, 만들어 보았고, 나누어 먹었다. 신기하게도 밥과 김치를 좋아하는 내 곁에는 늘 빵과 주전부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에서 함께 살았던 윤희 언니, 단아 씨, 우리 동서, 그리고 삼송의 국희 언니까지.

요즘은 동네에서도 맛이 훌륭하고 가성비 좋은 빵집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도, 모양도 없고 맛도 없는 빵을 기뻐해 준다. 특별한 것은 맛이 아니라 정성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목동에 와서 새로 사귄 유치원 친구 엄마들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어 마침 전날 구워둔 마들렌을 챙겨 나갔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 이어졌다. "주원이 엄마는 참 여성스럽네요.", "살림꾼이네! 살림꾼!"

 

아직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정쩡한 얼굴로, 고작 빵쪼가리 몇 개 위로 쏟아지는 과분한 칭찬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질소로 과대 포장된 과자봉지가 된 것 같은 느낌만은 떨칠 수 없었다. 가사와 육아에 최적화된 프로 살림러. 구첩 반상을 척척 차려내고 내 아이가 먹을 빵은 늘 직접 만들어 먹이는, 아닌데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뒤늦게나마 그분들의 오해를 정정하자면 첫째, 나는 여성스럽지 못하다. 심지어 나는 그 날 그 마들렌을 챙겨 시간맞춰 도착하려다 길바닥에 엎어져 바지가 찢어졌다. 빵이 들어있는 통만은 움켜쥔 채.. 둘째, 좋아서 하는 살림이 아니며 잘하지도 못한다. 무수한 취업의 문턱에서ㅡ좌절 끝에 울며 겨자먹기로, 더이상 얼마 되지 않을 내 노동력의 가치와 맞바꾼 살림과 가사의 길이기에. 그리고 잘하지 못한다, 이 문장엔 부연할 여지가 없으리라.


솜씨도 없고, 부지런하지도 못한 내가 민망함과 게으름을 무릅쓰고 뭔가 먹을 것을 전했다면, 그건, 무형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는 뜻으로 알아준다면 좋겠다.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그 사람을 알아가고, 좋아하고 싶은 마음, 내가 받았던 것처럼, 사소한 선물의 격려와 위로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언젠가 단아씨가 진저브레드 쿠키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흔한 쿠키라서, 외국에서 온 단아씨에게는 익숙한 이름, 익숙한 간식이었을 것 같다. 만들어보고 싶어서 쿠키틀을 사 놓았는데,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아직 해 보지 못했다고. 그 때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이번 크리스마스에 나누어 줄 오십 인 분의 쿠키를 만들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었던 우리. 107동과 110동 주민이었던 우리. 지금은 비록 멀어졌지만, 마음만은 가까이 있는 우리이길 바래본다. 고마웠어요.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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