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밤 Sep 22. 2020

직업은 주부입니다. 집에만 있지는 않습니다만

집에 갇힌 엄마, 탈출을 꿈꾸다.

길었던 한 주가 또 갔다. 밥을 하고, 또 밥을 했다. 집콕을 대비한 식량들도 삼식이들의 파죽지세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한가해진 신선칸들을 바라보며 내 스스로에게, 자네도 고생 많았네. 칭찬을 건넨다.

금요일. 냉장고의 오래된 반찬을 정리하고, 꽤 오랜 설거지를 마친 뒤, 먹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콩나물 한 줌을 마지막으로 가득 채운 쓰레기봉투를 꽉 묶어 내다 버렸다. 그리고 생각한다. 오늘 저녁은 주방도 안 쓸 거고, 쓰레기도 만들지 않으리라.


피자를 시켰다. 라지 사이즈 여덟 조각을 주원이가 2.5, 나 1.5, 아빠가 4의 지분으로 앉은 자리에서 피클까지 몽땅 먹어치웠다. 역시, 먹성만 있다면 쓰레기가 안 나온다는 점에서는 피자가 최고다. 할 것도 없는데 남편이 설거지를 한다고 나선다. 월화수목금요일 중 피자를 먹은 날 설거지를 하겠단 말이지? 잠시 그의 선의를 의심해 보지만, 어쨌든 고맙다.

애를 맡겨 놓은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그릇 몇 개, 주방의 위생 정도를 맡겨놓았을 뿐인데도 불신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기웃기웃. 괜스레 주변을 정리하고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하고 있다. 이렇게 할수록 열심히 한다는 사람의 의지만 꺾어 놓을 뿐인 줄 알면서도 그런다. 어릴 적 방을 치워 볼까 하면 방 좀 치우라고, 공부 해 볼까 하면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던 우리 엄마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청소나 빨래, 가사에 빼앗긴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시간을 내어주었을 뿐, 엄마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명확했고 그렇게 엄마는 늘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엄마는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부터, 이미 무엇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엄마는 녹초가 되어 퇴근을 하고 우리의 식사를 빠짐없이 챙겨 주고 나서는, 설거지가 마무리되었든 그렇지 않든, 매일 수영장에 갔다. 무려 십 년을 말이다. 그렇게 삼십 삼 년의 직장생활 동안 엄마는 수준급의 수영 실력을 갖추었고, 아마추어 탁구 고수가 되었고, 배드민턴을 치고 붓글씨를 썼으며 플루트 연주자가 되었다. 은퇴하시고 난 지금은 하루에 아홉 시간씩, 플룻을 연습하신다. 이제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닌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고,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오빠가 고3이던 해 여름 방학에도 엄마는 이 주라는 긴 일정으로, 보름도 거뜬할 만큼의 반찬을 냉장고 가득 채워놓은 채 홀연히 여행을 떠났다. 당시에는 꽤 반가운 일이었지만, 뒤늦게 엄마가 되고 보니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용기다. 물론 나는 엄마가 아니므로 엄마처럼 살 수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집안일이며 육아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강박적인 매뉴얼로 살아가고 있는 요즘의 나는 소중한 인생을 얼마나 흘려보내고 있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결혼 전, 인사를 드리기 위해 시댁을 처음 방문했던 날을 기억한다. 나무로 된 거실 바닥은 반짝반짝 윤이 났고, 집안의 가구들에는 쌓여 있는 물건은 커녕 먼지 한 톨이 없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날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우리 집에서는 평생 볼 수 없었던 놀라운 풍경이었다. 나중에야 들은 말이지만, 남편 또한 처음 우리 집에, 내 방에 놀러 왔던 날 나와 비슷한 문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먼지가 쌓이다 못해 두껍고 뽀얗게 굳어진 내 방에서 말이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주말 부부로 아이 둘을 혼자 돌보다시피했던, 워킹맘이었던 우리 엄마에게 청소는 주말에나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나도 청소라는 건 일주일에 한 번이면 되는 줄 알고 자랐기에, 주중에는 여전히 마음껏 집을 어지르고 주말이 되면 청소기나 적당히 돌리면서 지냈다.

빨래도 일주일을 모아서 했다. 널고 개는 것도 귀찮아 널어둔 곳에서 속옷이며 수건을 걷어다 쓰곤 했었다. 빨래 개는 법조차 몰라 어깨 너머로 훌륭하게 보고 자란 남편에게 속옷 접는 법, 수건 각 맞추는 법 등을 일일이 전수받았다. 남편의 우렁찬 코골이에 적응하지 못해 혼자 거실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하던 시절이었고, 출근 시간에 쫓겨 이불은 개지도 못한 채, 퇴근해서 돌아오면 걷어차고 나온 모양 그대로인 이불에 들어가 자는 날도 허다했다.


그랬던 털털이가 아이를 낳고, 전업 주부가 된 지 만 육 년 만에 매일 아침 청소기를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빨래를 하루라도 묵히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수시로 베갯닙과 이불을 빨고 널어대는 강박증 환자가 되었다니.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살림의 기본을 가르쳐 주었던 가사 사수, 남편에게 집안일의 상사쯤 되는 것처럼 꼰대 같은 지적질을 하고 있다니! 격세지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평생을 누구보다 깔끔하게 살아오신 우리 어머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집안을 갈고닦는 일에 예전만큼 정성을 쏟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뒤늦게 한국무용과 자전거 타기에 적성과 흥미를 발견하신 우리 어머님은 청소도 뒷전으로, 40km의 아라뱃길을 완주하시고 무용 공연을 준비하시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 좀 더 젊었을 때, '집'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씀도 하셨다.


집콕 주간. 일곱 살. 어느새 꽤 자란, 외동아이 하나를 돌보는 일은 사실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때마다 밥을 차려 주면 일단 제일 중요한 의무는 다 한 것일 테다. 떠먹여 줄 필요도 없다.

이 다음부터는 피로가 더해지는 일이다. 아이는 끝없이 어지름에도 불구하고 집은 깨끗이 유지되어야 하고, 빈둥거리는 꼴은 차마 볼 수가 없으므로 오전에는 영어 공부, 오후에는 수학, 피아노도 매일 연습해야 하고, 책도 좀 읽어라 하는 그 순간부터 말이다.

시간표 없이 시간표가 있는 것처럼 바쁜 하루가, 며칠이, 지나며 이상하게도 뿌듯함보다는 내 안의 공허가 더 커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주말이 다가올수록 그 공허한 구멍은 자꾸만 커져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덮치기 전까지, 나는 오랜만에 인생에서 꽤 행복한 시절이라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 가을, 목동으로 이사를 온 직후부터였다.

행복해지는 방법. 그걸 발견하는 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실천은 아주 쉬웠다. 무엇보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난 아홉 시부터 두 시까지의 시간. 그 시간 동안 집과 집안일에 대한 모든 의무감에서 최대한 벗어나 있는 것. 그리고 그 시간 동안은 무엇이든 좋으니 오직 '나'를 위한 시도를 할 것.

그 시간을 위해 나는 하나뿐인 화장실에서 출근하는 남편을 방해하지 않도록 삼십 분, 한 시간을 먼저 일어나 씻었다. 등원 준비를 하며 아이를 깨워 아침을 차려주고, 버스를 타러 나가는 아홉 시까지 거실에 깔았던 이불 두 채를 개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거나 걷는 일까지 모두 마치고 나서는 쓰레기봉투나 분리수거 박스와 함께, 노트북이 든 가방을 메고 아이와 함께 서둘러 집을 나섰다.


조금 더 디테일에 힘쓰고 싶은 정리 정돈과 집안 위생에의 유혹을 떨치고, 어렵사리 집에서 탈출하는 데까지 성공! 그런데, 갑자기 멍해진다. 나의 영역, 나의 직장, 나의 독무대였던 집 밖을 벗어난 주부는 이제 막 쇼생크 감옥을 탈옥한 무기수처럼, 이제 막 깁스를 푼 다리로 걸음을 떼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방치해 온 근육을 곧장 사용할 수 없었다. 나는 무얼 하고 싶은지, 내가 무얼 할 수 있을지, 막연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아침 집을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꽤 오랫동안, 매일 책을 읽었다. 책은 집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눈에 거슬리는 먼지들도, 화장실 냄새도, 어떤 것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글을 써 보는 것은 어떻겠냐며, 이 년 전 남편에게 선물 받은 노트북은 늘 제자리, 새 것 그대로인 채였다. 뭐라도 시작하고 있는지, 가볍게 묻는 말에는 빚 독촉이라도 당한 듯 괜스레 발끈하며, 당최 매일 집안에만 있는 나에게 글로 쓸 만한 특별한 일이 무엇이겠느냐고 쏘아붙이기만 했었다.


묘했다.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나자, 여전히 특별한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무엇이든 쓰고 싶어졌다. 어느 날부터 나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시 돌아보아도 자랑할 만한 떳떳한 시간은 인생의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채 마무리되지 못한 채 가라앉아있던 감정들,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젊은 날. 다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시간들이 나라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 전부였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스스로 적어내려간 그 이야기들을 통해, 지나온 시간에 두고 온 아픈 감정들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어딘가, 나와 닮은 누군가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나의 이야기가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새 나는 그런 작은 꿈을 꾸고 있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플랫폼을 찾고 글을 다듬으며 지냈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것 같았고, 비로소 행복했다.


당시 동네 카페에서 우연히 내 뒷모습을 본 아이 친구 엄마가 후에 내게 물었다. '일'을 하시느냐고. 노트북을 붙들고 잔뜩 몰두해 있던 모양새가 오해를 샀던 모양이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답했다. "그럼 집에 계세요?"

그랬다. 그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자연스레, 으레 따라 나오는 질문이었다. 나는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매일 밖에 나간다. 어째서 돈을 벌지 않는 엄마는 '집'에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당연했던 물음이 처음으로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슬슬 학교에 가기 싫어지는 나이가 된 주원이도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엄마처럼 매일 집에 있고 싶다." "엄마는 매일 집에 있어서 좋겠다."

아이의 그 천진한 말조차 아프게 다가와서였을까? 별 것도 아닌 브런치 작가가 되셨다는 축하 메일을 받고 울컥한 나는 아이를 꼭 안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 이제 글 쓸 거야. 그러니까 친구들이 엄마 뭐하시는데? 물어보면 우리 엄마는 글 쓴다고 얘기해 줘. 집에 있다고 하지 말고.."


코로나가 번지며 다시 시작된 집콕 생활. 나는 금세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집이라는 감옥에 다시 갇힌 채 부지런히 쓸고 닦고 음식을 만든다. 겨우 일곱 살이 된 아이의 학습 결손을 걱정하며 수업 시간만큼은 공부를 시켜야 안심이 된다. 저녁이 되고 일과가 끝나면 다음 날의 무게에 눌려 그리 피곤하지도 않은 몸으로 잠을 청하고 만다. 다시, 내 자신이 사라져 간다.

피자를 먹고 콜라까지 들이킨  아이를 재우며  시부터 잠에 들었다가 문득 잠에서  새벽, 오늘의  기분을 나는 기록한다.  시간 어딘가에도 나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위해 깨어 있는 영혼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때로는 슬퍼져도 다시금 힘을 내며 씩씩해지는 엄마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무엇보다 우리 모두,  밖을 탈출할  있는 자유로운  날이 다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이전 09화 가사는 적성에 안 맞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