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겐 속옷 선물이 필요하다
엄마의 삶 가운데 지금 소중한 건 무엇일까? 있다 해도 그걸 즐길 수 있을까? 엄마가 받아야 할 대가를 빼앗은 건 세월이 아니라 나였다.
134p,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 이충걸
우리집에는 큰 침대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아침마다 거실에 깔았던 어린이 매트며 이불을 개어 넣는데만 이십 분이 걸린다. 솜이불을 개고 나면 거실에 먼지가 풀풀 날려, 매일 아침 청소기도 돌려야 한다. 전날엔 남편이 유일한 취미 활동인 사내 동호회 농구를 하고 밤 열한 시가 넘어 돌아왔다. 오늘의 빨래는 절대 미루지 않는 나이지만, 열한 시가 넘은 시간에 세탁기를 돌릴 수는 없기에 하는 수 없이 아침에 일어나 시작 버튼을 눌렀다.
아이는 아침을 먹어야 하니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불고기를 꺼내 데우기 시작한다. 그 사이 밥통에서 밥을 푸고, 볶은멸치 반찬을 꺼내 밥 위에 조금 덜은 뒤 비로소 따뜻해진 불고기를 넣어 비빈다. 마구 섞어 비빔밥. 입이 짧은 아이라 몇 숟갈이나 뜨고 갈 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아침이다. 아이는 역시나 입맛이 없다. 나는 이리저리 집안을 오가며 이미 잔뜩 밥알을 물고 우물거리는 입에 숟가락을 한 번이라도 더, 부지런히 우겨넣는다.
유치원 버스를 타려면 이제 나도 슬슬 옷을 갈아입어야 할 시간이다. 잠옷을 벗어던지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사이 빨래가 다 되었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자연스럽게, 팬티 바람인 채로 세탁기를 열어 젖은 빨래뭉치를 가져다 널었다.
밥알을 오물거리며, 어느새 쪼르르 곁에 와 있던 아이가 묻는다. "엄마. 엄마 팬티는 왜 살이 다 보여?" 아이의 말에 입고 있던 속옷을 내려다본다. 앞은 괜찮아 보이는데..
힘들게 고개를 꺾어 엉덩이 부분을 바라보니 정말 아이의 말대로 허연 속살이 다 비추어 보였다. 실크로 된 섬유가 얇아질 대로 얇아져, 살이 비칠 지경이 된 것이었다. "이거 오래돼서 그래." 살이 비치거나 말거나. 나는 바빴다. "얼마나 오래됐는데?" 아이는 계속 말을 시켰다.
"이거?"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이거..십 년쯤 된 것 같은데.” “뭐??? 십년??? 근데 그게 (몸에) 맞아????"
아이다운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일 년에 몇 센치씩은 꼬박 꼬박 키가 자라고 있었고, 그 때마다 몸집도 커져 늘 새 속옷을 바꾸어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도 그날 처음 알았다. 내가 거의 하루 걸러 입고 있는 이 팬티가 무려 십 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엄마, 그럼 그 파란색 팬티는?" 아이가 말한 파란색 속옷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팬티와 거의 번갈아 가며 즐겨 입는 것이다. "그거? 그건 오 년쯤 되었나." 대답하고 보니 그 물건도 벌써 오 년이 되었다. 다행히 그쪽은 실크 소재가 아니어서 꽤 질기고 튼튼하다.
낡아버린 팬티를 자각하고 조금은 서글픈 아침. 불현듯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가 사시사철 착용했던, 모양도 색깔도 촌스러운, 그마저 색이 바랜 낡은 속옷이 아직도 내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우리는 그 속옷을 정말 싫어했다. 얼마나 꼴보기 싫었으면. 오빠는 중학생이 되던 해 동네 대리점에서 새벽 신문 배달을 하고 탄 첫 월급으로 부랴부랴, 엄마에게 속옷 세트부터 안겼을 정도였다.
그 시절의 엄마도, 지금의 나도. 속옷 하나 새 것으로 못 사 입을 형편은 아니다. 어떤 일에는 꽤 사치도 부리며 산다. 그런데 어째서 엄마의 속옷은 그 모양이었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부터 다 해어진 팬티가 이상한 줄도 모르고 살았을까. 우리 모녀의 내면(!)의 아름다움은 언제부터 다른 우선순위에 밀리게 된 걸까.
조만간에 낡은 것은 좀 버리고, 깨끗하고 예쁜 속옷을 사 입어야겠다. 그리고 틀림없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을 엄마에게도, 질 좋은 면으로 된 새 속옷을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엄마는 절대, 절대 새 속옷을 스스로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가끔은 엄마의 팬티 상황을 점검하자. 그녀들에게는, 속옷 선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