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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19. 2020

아빠 차, 뽑았다. 널 데리러 가.

한 달 쯤 되었을까?


흥분한 목소리의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 사기의 전력이 화려한 지인을 만나러 대전에 내려가신 아부지가 상의도 없이, '외제차'를 사셨다는 거였다. 그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중고'로. 엄마는 사람 좋은 아빠가 이번에도 분명 덤터기를 쓴 것이 틀림없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아. 아니길 바랐지만. 사십 년을 함께한 배우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평생 속고만 살아온 아빠는 이번에도 작정하고 물건을 팔러 나온 사기꾼을 당해낼 수 없었다.

사기꾼의 썰을 들어보자면 이러하다: 자신은 '명차' 애호가이며, 그간 여덟 대가 넘게 좋다는 수입차를 바꿔 타 보았지만 이 영국 차가 가장 훌륭하고 마음에 들어 모두 팔고 이 차 한 대만 남겨두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음주 단속에 걸려 면허 취소를 당했으며 차를 타고 싶어도 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판매하려 한다. 탐내던 사람들이 많아 사겠다고 줄을 서 있는데, 네게 처음으로 귀뜸한 것이니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당장, 현금 천 오백을 입금하면 아끼던 나의 '명마'를 너에게 물려주겠노라고. 무려 수입차인데, 명차인데, 천 오백이면 거저가 아니겠느냐고. 너를 아껴 헐값에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너무 감동하지는 말라고.


이런 일에는 참으로 순진하고 바보같은 우리 아빠는 만 원짜리 한 장 허투루 쓰지 않고 저축해 온 돈 천 오백을 있지도 않을 경쟁자들에 뒤질세라 부리나케, 보내고 말았다. 어떤 모델인지, 연식이 어떻게 되는지, 몇 키로나 뛴 차인지 묻고 따지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어 차를 건네받으러 나간 아빠는, 그리고 서울에서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우리는 그 사기꾼인지, 노망난 할아버지인지의 뻔뻔함과 대담함에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무려 영국의 명차 '랜드로버'라던 차는 알고보니 우리가 흔히 보아온 '디스커버리'도, '이보크'도 아닌 중고차 가격이 얼마 하지도 않는 저렴한 '프리랜더' 모델이었고(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만이지만, 여기까지는 약과였다.) 새 차로 구입해서 8년밖에 타지 않았다는 차의 미터기 수치는 무려 '24'만 km. 지구를 다 돌았어도 여섯 바퀴는 돈 셈이다.


중고차 시장이 아니라 폐차장에 가야 할 차를 돈을 받고 팔았다는 사실에 엄마와 나, 아들과 사위까지 분노했다. 엄마는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가 어딜 그리 쏘다녔기에 8년 동안 24만 키로를 뛸 수 있었느냐며 인신공격마저 해댔다. 아빠 역시 24만이라는 숫자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 허망한 얼굴이었지만, 그 할아버지에게 이미 건넨 돈을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했지만, 아빠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속고 또 속아주면서도 믿어온 지인에게 크게 실망하면서도 아빠는 '수입차 애호가가 고르고 고른 차 중의 차' 라는 진실성 없는 홍보 멘트만큼은 여전히 믿고 싶은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일 억 오천이 아닌, 천 오백만원에, 타보고 싶었던 수입차, SUV를 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아빠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1987 내가 태어나던 해에, 면허를  아빠는  자가용을 샀다.  이름이 기아야? 묻던 나에게 기아가 튼튼해서 'KIA'라고 지었다던(아빠의 설명이라 맞는지는 모르겠다), 기아 자동차에서 만든 '캐피탈' 이라는 차였다. 기아가 튼튼하다던 1980년대의 자동차는 이름만큼 견고하지못했던 모양인지, 걸핏하면 고장이 나기 일쑤였다. 숱하게 멈춰서고 탈이 났던 .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어찌됐든 아빠는 일 년의 대부분을 고장으로 서 있던 흰 색 캐피탈을 마지막으로 2001년, 중간 퇴직을 하며 받은 퇴직금으로 역시 흰색의, sm5를 사기까지 14년 간ㅡ뒤늦게 면허를 딴 엄마가 구입한ㅡ누가봐도 아내 차를 끌고 나온 것 같은 새빨간 아반떼를 빌려 타고 다닌 것 외에는, 새 차를 바꾸지 않았다.


2005년 가을, 엄마의 생일에, 아들과 딸을 모두 무사히 대학에 들여보낸 그 해에 아빠는 엄마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가 담긴, 멋진 차를 선물했다. 당시 국산차 중에서는 꽤 비싸고 근사한 중형차였다.

2012년, 몇 년간 죽만 쑤던 장남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 이듬해 허세 가득한 아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외제차도 선뜻 사 주셨다. 정작 본인은 십 년 전에 뽑은 sm5를 여전히 애지중지 타고 다니시면서도 말이다. 아빠는 그랬다. 자신에게는 작은 것 하나도 지독히 아끼시면서도, 가족들에게는 늘,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다.


십 삼년 간 작은 튜브 도급사를 운영하셨던 아빠는 늘 말씀하셨다. 사장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사원들 눈에 보기 좋지 않다고. 애초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조금이라도 남에게 있어 보이는 것은 질색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아빠가 껌 파는 할머니를 그냥 지나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혼자 식사를 하더라도 차마 짜장면 한 그릇은 시키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단히 부유한 재력가는 아니라 해도 집도, 약간의 저축도, 연금도 있으며 자식들을 모두 키워 출가시킨, 곧 칠십을 바라봐 언제까지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생에 한 번, 마음에 드는 멋진 차를 한 번 운전해 보고 싶다고 한들 그 누가 허세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아빠는 아주 오래전부터 벤츠에서 나온 세단이 멋지다고 하셨다. 벤츠 E-class 세단이 아빠의 로망이었다. 몇 년 전부터는 갑자기 SUV를 알아보기 시작하셨다. 손주라고는 달랑 하나 뿐이시면서, 아빠의 꿈은 대형 SUV에 '손주들'과 가족들을 모두 태우고 달리는 거였다. 심사숙고 끝에 '모하비'로 드림카를 결정한 아빠는 결국 새 차가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그마저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늘 차에 관심이 많았다. 새 차가 출시되면 늘 그 차는 이래서 좋고, 이래서 나쁘고, 이미 익히 알아보고 눈여겨보신 듯한 말씀을 하셨다. 엄마 역시 33년을 일하고 받은 퇴직금으로, "여보, 당신 '벤츠'를 삽시다. 내가 사 드릴게요. 타고 다니셔요." 몇 번이나 권했지만 그때마다 '어차피 주차장에 세워둘 텐데. 돈이 아까워.' 라며 거절하셨다고 한다. 그런 아빠가, 고작 천 오백만원 짜리, 폐차 직전의 중고차로 이토록 행복해하고 계시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 오전에 다른 볼일이 있어 각자 차를 가지고 관악산에서 접선한 부모님과 우리 가족은 즐거운 산행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각자의 차를 타고 목동으로 출발했다. 남편과 나는 슬쩍, 주원이를 '할아버지 차'에 태웠다. 주원이도 할아버지의 멋진 새 차에 타는 것에 신이 나 있었다. 67세의 오너 드라이버 할아버지, 할머니, 주원이는 빗속을 달리는 드라이브를 함께 했다.


아빠의 새 차


안 그래도 고장이 잦기로 유명한 영국 차, 24만 키로를 달려온 덜덜대는 프리랜더가 언제 엔진이 멈춰 서 버릴 지는 모르겠다. 소원이 있다면 부디, 그 차의 엔진이 꺼지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내가, 능력있는 딸이 되는 것. (하지만 어떻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지나,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오신 존경하는 아버지에게 멋진 차를 선물하고 싶은 딸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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