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우리 집도 다른 집과 비슷한 일상이었다. 평일에는 아빠의 퇴근을 기다려 늦은 저녁을 먹고 주말엔 고궁 나들이도 가고, 가장 더운 7월 말부터 8월 초를 전 국민이 동해안을 향하는 꽉 막힌 경부 고속도로 위에서 보내는 것. 도착하면 아빠와 오빠는 텐트를 조립하고, 엄마는 부루스타와 코펠을 꺼내고, 라면을 먹고, 물놀이를 하고, 먹고, 다시 물놀이를 하고, 모래를 완전히 터는 건 어느 순간 포기해 버리는 것. 파도소리 들려오는 백사장에서 잠을 자고, 주머니 가득 짐가방 가득 모래를 담고 돌아오는 그런 여름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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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가 터진 바로 그 해 봄에, 회사의 중국 공장 개발 계획으로 어느 날 갑자기 아빠의 근무지는 차로 한 시간 거리였던 인천에서 비행기 두 시간 거리의 중국으로 바뀌어 버렸다. 더 이상 아빠의 퇴근을 기다려 저녁을 먹을 일도 없어졌고, 온 가족이 하는 외식이나 나들이도, 다 같이 떠나는 여름 바다도 없게 되었다. 엄마와 우리는 서울에, 아빠는 중국에서, 그렇게 떨어져 살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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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무것도 몰랐을 나이의 나에게는 아빠 없는 일상이 그저 허전했을 테지만, 그 발령이 불운이 아니라 천운이 따랐던 것임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아빠의 근무지였던 인천 공장이 IMF로 공장 문을 닫으면서, 공장장 아저씨, 중대장 아저씨(당시만 해도 제조업체들은 ROTC를 우대 채용했다고 한다), 짠돌이 아저씨를 비롯해서 오랫동안 함께 일해왔던 동료분들 대부분이 직장을 잃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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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 겨울방학, 그간의 주재비를 아껴 아빠는 가족들을 초대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봉고를 렌트해서 편안히 다녔고, 전용 가이드도 있었다. 깔끔한 호텔에 묵었고 들르는 식당도 모두 훌륭했다.
여행의 끝에서야, 아빠가 생활하는 공장과 좁은 공용 아파트를 방문할 수 있었다. 어른들의 합숙소 같은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잠을 청해야 했던, 총각 직원이 쓰고 있다던 작고 낡은 방에는 성인 여자의 브래지어 같은 물건들이 먼지 속을 굴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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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발전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기억 속 1997년 중국은 여전히 황무지 같은 느낌이었다. 번화한 도시라던 상하이에는 얼마 전 완공했다는 동방명주 하나만이 우뚝 솟아 있었다.
가족들도, 익숙한 풍경도 하나 없는 땅에서 아빠는 3년을 계셨다.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이메일도 아닌 팩스로, 흐릿해 읽기도 힘든 손편지를 서너 장씩 보내오셨다. 주로 엄마 말씀을 잘 들으라는 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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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이산가족 생활은 중국 공장이 차질 없이 돌아가고, 아빠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IMF로 수도권에 있던 공장들이 모두 문을 닫아 돌아올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대전 공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에서 주말 가족으로, 조금 나아졌을지 모를 형태의 일상을 다시 시작했다.
어느덧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아빠도 40대 후반이 되셨다. 대전 공장에서 업무에 시달리며 건강이 악화되셨고 일반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없는 지경으로 위장병을 앓으셨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위해 맞벌이를 하면서도 매주, 매 주말마다 일주일 치의 반찬을 만들어 커다란 짐가방 가득 들려 보냈다.
일요일 저녁, 다른 집, 다른 가족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 집은 매주가 늘 같은 풍경이었다. 저녁 식탁을 채 정리하지도 못한 채, 낮부터 부지런히 만든 뜨거운 반찬통을 가득 담은, 무겁고 커다란 가방을 든 아빠가 다 낡은 컴포트화를 신는다. 춥고 캄캄한 겨울 저녁이라도 예외는 없다. KTX도 없던 시절. 돌아가는 길은 한참이다. 엄마는 차 키를 들고 나간다. 가끔은 나도 따라 탄다. 영등포 역 롯데 백화점 앞에 아빠와 큰 가방을 내려준다. 서로가 손을 흔든다.
열여섯, 중3이 되던 가을 무렵 아빠는 대전의 공장을 떠나 한 시간 거리의 시골인 금산군으로 가시게 되었다. 퇴직을 하고, 대신 회사에 물건을 납품하는 도급사를 맡게 되신다고 했다. 회사에서 임명하는 계약직일 뿐이지만, 나름 사장님이라는 직함도 얻게 되셨다.
아빠가 일해온 수고에 비해 퇴직금은 너무 작았다. 해외 발령과 지방 근무로 엄마의 새빨간 아반떼를 빌려 타던 아빠는, 퇴직금으로 중형의 세단을 샀다. 펄감이 있는 진주색이 좋을지, 무난한 실버가 나을지, 조금 특별한 옥색은 어떨지. 카탈로그를 들고 며칠을 고민하던 엄마 아빠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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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출신인 아빠에게 금산에서의 생활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듯한 만족감과 안정감을 주었다. 아빠는 금산을 사랑했다. 치열한 경쟁과 압박에서 벗어난 아빠의 건강도 점차 나아져 갔다. 사람도 없고 차도 없는 시골길을 달려 아빠는 출근과 퇴근을 하고, 십오 평짜리 아파트에서 수저 몇 벌, 그릇 몇 개만 가지고 일인용 살림을 시작하셨다. 질린 접시, 낡은 커튼, 안 쓰게 된 장롱. 하나도 버리지 않겠다는 아빠의 고집이었지만, 금산에 가져가면 실제로 훌륭한 쓸모가 있었다.
우리 가족의 휴가 장소도 아빠의 금산 집이 되었다. 충청도에 있어 어디든 반나절이면 갈 수 있고, 서울을 빠져나가기까지의 교통 체증도 없다. 금산 상리 주공아파트는 우리 가족의 베이스캠프이자 여름 콘도였다. 금산의 명소 보석사, 십이 폭포는 물론 여름이면 지리산으로, 삼천포로, 남해바다로도 놀러 다녔다. 서울집에서 쫓아낸 살림살이로 음식도 하고 인테리어도 하면서, 엄마는 소꿉놀이 같다며 즐거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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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5년 계약이라던 회사는 아빠의 무사고 운영에 힘입어 3년 더, 1년 더, 계속해서 재계약을 이어갔다. 내가 주원이를 낳던 해, 은퇴 정년을 꽉 채우고서야 비로소 아빠의 삼십 오 년 간의 출퇴근은 끝이 났다. 정리해고로 악명이 높던 회사에서, 정년까지 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좋은 운과 기회가 따라준 덕택도 있었겠지만, 아빠의 성실함과 탁월함, 무엇보다 가족을 생각하는 절박한 마음이 있었을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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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하시고도 아빠는 여전히 금산과 서울 집을 오가며 생활하신다. 금산은 아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처음 맞은 연휴에는 남편과 고속버스를 타고 아빠에게 내려갔다. 주원이를 낳고 나서는 여름방학마다 금산에서 휴가를 보냈다. 방학 기간에는 어딜 가도 사람이 붐빈다. 대전만 해도 그렇지만 금산에는 사람이 없다. 마음껏 돗자리를 펴고, 아무데서나 배드민턴을 치고, 커피가 든 보온병만 있으면 어디든지 경치 좋은 카페가 된다.
주원이는 엄마 아빠와 잠이 들어도 아침에 눈만 떠지면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를 찾아 눕는다. 금산 할아버지는 주원이를, 주원이는 금산 할아버지를 아끼고 사랑한다.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된 지금에서야, 아빠가 느꼈을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본다. 아빠의 긴 편지에 매번 답장하지 못했던 것, 일요일 저녁 예능 프로그램을 보느라 아빠를 제대로 배웅하지 못했던 것,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아빠를 서먹하게 느낀 것, 아빠의 희생으로 얻은 안락함에 감사하지 못했던 날들을 뒤늦게 후회한다. 후회하면서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고, 여전히 무뚝뚝한 딸일 뿐이지만 말이다.
아빠에게 해 드린 유일한 효도라면 주원이를 낳은 것이다. 남다른 자식 사랑을 마음껏 펼치시지 못했던 아빠는 주원이에게 그 잠재력을 모두 쏟아부으시는 듯하다. 아들과 딸, 사위와 며느리, 아직은 하나뿐이지만 곧 더 늘어나길 바라는 손주들까지. 모쪼록 지금부터의 아빠의 인생은 늘어난 가족들로 인해 조금 더 북적거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