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은 교보재(敎保材)가 아닙니다!
내 옆, 간호장교실 바로 앞에 뉘여졌다는 것은 그만큼 위중하다는 뜻이었고, 두 눈 전체를 붕대로 싸매고 있는 모습 역시 심상치 않았다. 나는 단숨에 잠이 깼지만, 아무런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이 친구는 또 무슨 사고로 이 한밤중에 실려와서 여기 내 옆에 누워있나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조금 있다가 이른 아침, 간호장교들이 출근하기도 전에, 그 친구는 침상채로 이동해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는 수술실로 갔음을 직감했다. 누워서 기다린지 서너시간 후에야, 그 친구는 다시 병실로 침상채로 돌아왔고, 역시 아무 말이나 신음소리없이 두 눈을 붕대로 감싼채로 누워 있을 뿐이었다.
우리 둘이 간호장교실 앞 침상에서 그렇게 침묵속에 누워 있는 동안, 다른 침상들에서는 시끌시끌 떠드는 소리, 병실 바닥을 물걸레로 닦는 이들의 수다소리, 오늘 아침은 오랜만에 햄버거와 우유가 나와서 두개를 타먹었다는 자랑 등등 활기찬 소리들만 가득했다. 나는 누워서 생각했다. 그래 나 말고 다른 이들은 다 치유되거나 적어도 완벽히 적응했구나...
내 옆 침상의 친구는 나와 같은 나이였고, 합천이 고향인 계명대 재학생이었다. 주 O환 상병, 그는 철원의 3사단 백골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야간사격 후 쪼그려 걷기 얼차려를 받던 중, 균형을 잃은 앞 사람이 뒤로 넘어지면서 개머리판이 안경을 강타하는 바람에, 유리 파편들이 안구 전체를 타격해서 정말 심각한 상태로 헬기로 수통까지 후송되어 온 터였다. 오후 늦게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여자 친구가 병실에 면회를 왔는데, 수술 후 꼼짝 못하고, 두 눈 전체에 붕대를 감싼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침상에 머리를 대고 통곡을 하셨고, 여자친구라는 애는 (내가 "애"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나중에 전해들었는데, 결국은 그녀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기 때문이다!!!) 그저 창문가로 가서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비록 안대로 왼쪽 눈이 가려졌지만 그 슬픈 그림같은 광경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주상병은 가족들이 면회라도 오는데 나는 뭔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며칠 지나면서, 내 휠체어를 밀어주는 환자도우미들의 "어쩔 수 없는 사정"들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다들 육군, 해군, 해병대도 있었고, 군단 특공연대 출신도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안과/이비인후과 병동이다 보니 후유증들이 다양했는데,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된 치료와 의학적 처치의 결과인지 의심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누구는 수술 후 눈이 감기지 않아서 늘 조그만 플라스틱 인공눈물통을 가지고 다니면서 눈이 건조하지 않게 투여해야 했다. 누구는 주먹을 1/4분면에 갖다 대면 보이는데, 3/4분면에 갖다 대면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식으로 시야에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 누구는 매일 울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수술때 눈물샘을 잘못 처치해서 눈물이 정상적인 사람처럼 목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겉으로 흘러내려서 그렇다고 한다. 이런 식의 수술 후 부분적인 장애가 온 병사들은 자대 복귀해서 정상적인 일상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일종의 주홍글씨같았던 의가사제대를 하기 싫은 환자들은 병원의 묵인하에 "나이롱 장기환자"가 되어서, 병실 청소를 돕거나, 중증 환자의 도우미를 하면서 지내다가 제대 막판에 복귀해서 "만기전역" 표시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저런 사정을 들으면서도 나의 상태가 과연 호전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바로 옆 동갑내기 주상병에게 마음이 갔다. 한 두어 주 나란히 침상에 누워 얘기를 나누며 친해진 나는 충격적인 얘기를 듣게 되었다. 원래 전신마취를 하고 눈 수술을 하다보니, 수술 도중 방광이 터지지 않게 요도에 삽관을 하고 수술을 하는데, 수술 중 각성을 다룬 영화 "리턴"에서 처럼 수술 막판에 요도의 통증과 (특히 남성이라면 요도가 길고, 삽관 시작 부분이 예민하고 극도로 좁은 곳이라서...) 마취약의 효력이 약해지면서, 수술실의 소리들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카세트테이프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수술 집도중인 군의관들은 그 소리에 맞춰 흥얼거리면서 수술을 하고, "아, 어떻게 하지요? 여기 꿰매는 게 아니었는데?", "야, 그냥 대충 꿰매. 어차피 상이등급 처리할 거쟎아". 이런 대화들을 듣게 되었지만, 몸은 움직일 수가 없고.........
그는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한쪽 안구를 적출해야 했으니까. 수술실 집도의들은 대개 대위 계급이었는데, 전문의 자격은 보통 소령 계급부터 보유하고 있었다. 소령들은 보통 직접 수술하기보다는,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대개의 수술들은 중위, 대위 계급의 군의관들이 집도하는 것 같았는데, 그들에게는 환자가 잘못 되어도 그냥 상이등급을 매겨서 의가사제대 처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니 그렇게 수술실에서 노래를 따라 흥얼거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침상의 하얀 시트위에 누워서 근처 교회에서 위문 온 성가대의 성탄절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혼자 눈물을 흘렸다. 불과 몇 명 밖에는 내가 이렇게 여기 누워서 한쪽 눈의 실명의 위협 앞에 불안해 하는 것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게 목욕을 못하니 속옷이라도 갈아입으라고 런닝 팬티를 사다 준, 농활 선배의 정성을 생각하며,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탄식하던 예수님의 고백을 떠올렸다. 우리는 젊은 몸으로 국가를 위해서, 국민들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지내다가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여기까지 왔는데, 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해 군복무를 하는 군의관들의 피치못할 "교보재(敎保材)" 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경외과 병동에는 수십년간 누워있는 머리 반쪽이 날아간 환자가 앙상한 허벅지를 드러내며 누워 있었고, 특공 무술 낙법을 하다가 바닥의 돌에 허리를 부딪혀 심각한 척추 부상을 입은 7군단 특공연대 상병 하나는 부대에서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휴가를 내어 아픔을 참고 노가다를 한 돈으로 CT를 찍어 부대에 제출하고야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고 울분을 토한다... 휠체어에 앉아서 한 쪽 눈에 안대를 하고, 이런 광경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나는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왜 이런 일들을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아픔에 왜 국가는 공감하지 않는가? 내 수술은 어찌 되었고, 그저 주사 몇 방과, 아픔을 참고 투약해야 하는 그 쓰린 안약들로 내 시력을 회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제대를 두 달여 앞두고 나는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이 복잡해 지던 연말, 주 상병은 결국 한쪽 눈을 잃고, 다른쪽 눈에서 계속 눈물을 흘리며, 나와 악수를 나누고는, 의가사제대 판정을 받고 수통을 떠났다. 평생 월 20만원 지급이라는 상이군경 3급(2급인지 3급인지는 정확치는 않다...) 판정을 받고.
그리고 나는 수통에서는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라는 말과 함께, 군 병원들 중에서 그 중 안과 부문 경험이 많다는 광주통합병원으로 작은 군용 미니버스에 실려 옮겨졌다. 한참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12월 중순쯤이었던가, 밤늦게 도착한 난생 처음 와본 전라도 광주의 하늘에도 가로등 불빛 아래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군대생활 에피소드 1-(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