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생활 에피소드 1-(4)

기억하며 치유하기

by 진성민

광주통합병원의 모포는 하늘색 인조 캐시미어 재질이었던 것 같은데, 아주 깨끗했고 좋은 냄새가 났다. 자대에서 덮고 자던 낡고 얇고 거친 국방색 모포와는 너무 달라서, 덮고 자면 마치 누군가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느낌까지 들었다. 나는 여전히 눈이 불편하고 거동도 조심해야 한다고 해서, 거기다가 말년 하사였다 보니, 청소나 작업에서도 열외여서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거나, 누가 가져다 준 마쓰시타 MyMy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으며 누워 지냈다. (그때 한창 유행하던 박정수 가수의 "그대품에 잠들었으면" 이라는 노래를 지금도 좋아한다....) 장기 입원 환자들을 위해서 몇 가지 소일거리나 취미들을 권장하던 병원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매일 오셨는데, 나는 그분한테서 동생이 수통에 있을 때 읽으라고 전해 준 책 속에 끼워져 있던 만원짜리로 실뜨개질 거리를 샀다. 흰색 성근 모기장 같은 것에 바탕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도안대로 온갖 화려한 색의 털실들로 대나무 바늘을 이용해서 그림을 뜨개질해서 완성해 나가는, 어찌보면 시력에는 안좋을 수 있는 취미거리였지만, 드넓은 녹색 초원에서 백마와 흑마들 네 마리가 유유자적 발굽을 들고 노니는 그 이미지가 너무 좋았다.


한겨울 병실에는 난로위에 가습기 대용으로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고, 크게 중환자가 없다 보니, 젊은 군인들이 간간이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는 소리들과, 투명한 창문 너머로 비취는 겨울 햇살이 광선처럼 환자들이 누운 침상들 위에 흩뿌려졌다. 나는 그 짧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평안함"을 느꼈다. 스무 살 남짓 살면서 늘 배수진을 치고 살아왔던 것 같은데, 그런 긴장감과 집중 대신,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 쉬기만 해도 되었다. 한쪽 눈이 어찌 되던 간에,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 매끼 주는 밥을 먹고, 나 혼자 자는 침대에 누워서, 따뜻한 모포를 덮고 잠들 수 있는, 배려받는다고 느끼는 그 시간들이 나름 행복했다... 이런게 가능한 세상이 있었다는 거네?


그러나, 제대일이 다가올 수록, 나는 결정해야 했다. 이대로 병원에 있다가 의가사제대를 할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완치되지 못할 눈인데, 자대복귀하고 만기전역할 것인지. 당시 문무대 입소 혜택을 받아 45일이 차감된 28개월 반이었던 군 복무 기간 중 거의 26개월을 채웠는데, 의가사제대라니! 나는 결국 안약 몇 개를 받아들고, 어느날 저녁 광주통합병원을 떠나, 고속버스로 서울로 와서, 다시 시내/시외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자대로 복귀했다. 녹색의 분대장 견장은 떼어 내고, 대신 안쓰던 안경을 쓴 채, 매일 내무반이나 행정반에서, 간부들의 교안작성을 돕거나, 작전병을 도와서 지도를 그리고 훈련일지 작성을 도우면서, 밤늦게는 몰래들 끓여먹던 봉지라면 몇 젓가락에 행복해 하던 약 2~3주가 지났다. 내 눈은 그렇게 나빠지지도, 좋아질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고, 나는 다행히 그렇게 만기전역을 했다.


그러면서도 늘 주상병이 생각났다. 한쪽 눈을 잃고, 말이 없던 그가 자꾸 생각났다. 나는 제대하고 나서, 그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었기에 집 전화나 편지가 연락수단의 전부였는데, 편지는 시간이 걸리고 응답의 확신이 없으니 집 전화가 유일했다. 합천의 집으로 전화를 한 지 수 차례 끝에, 결국 그의 어머니께서 내게 부산의 한 전화번호를 주셨다. 구포역 근처에 있는 고모집에서 묵는다고 했다. 나는 제대한 지 두어달 만에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주상병을 만나러 갔다. 그는 수척해진 얼굴로, 부산역앞에 나를 마중나와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가로 갔다. 우리는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서로 한 손을 잡고 걸었다. 한쪽 눈 만으로는 촛점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시야가 좁아져 있기 때문에 거리감각이 없거나 자꾸 주위와 부딪힐 수 있어서였다. 그럼에도 주상병은 같이 걸어가면서도 나와 자꾸 부딪혔다. 아, 아직은 익숙해 지려면 멀었구나, 그나 나나 그럴때마다 말이 없이 그저 웃었다.

부산 백악관 나이트클럽.png

그는 나에게, 부산에서 유명한 나이트클럽에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고딕양식을 흉내낸 흰색 나이트 클럽 건물, "백악관". 그나 나나 춤도 못추었고, 그 시끄러운 리듬의 음악들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왠지 주상병은 그런 왁자지껄한 속에서, 자신의 고통과 상실감을 위로받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부산까지 와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나이트클럽에 온 것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거듭 맥주잔을 들이키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아무말 없이 같이 있어주었다. 우리 둘은 그렇게 맥주 각 서너병씩을 마시고는, 적당한 취기를 즐기며, 동시에 각자의 군생활 시절, 가장 욕해주고 싶은 사람들을 언급하며 애써 큰 웃음들을 지어냈던 것 같다.

집안의 장손이었던 그에게 한쪽 눈을 잃었다는 것이, 비단 그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얼마나 큰 아픔과 상실감이었을지, 나로서는 그때 1/10도 짐작할 수 없었다. 서울 종로의 유명한 안과병원이자 의안전문 의료기 가게였던 공안과에 매년 와서 의안을 교체해야 하는 주상병의 심정은 어땠을까?

종로 공안과.png

다행히 주상병은 한쪽 눈만으로 적응해야 하는 상황을 잘 견뎌냈고, 고향인 합천농협에 취업도 했으며, 운전도 가능할 정도로 스스로를 닦달했고, 결혼도 해서 아빠가 되었다. 휴대폰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그 시절, 내게 그 소식을 전하던 그의 기쁜 목소리가 기억난다. 나는 나대로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하느라 바빴던 즈음,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살다가 어느새 연락이 끊긴 상태가 되었다.


나는 각막이 아무는 과정에서 생긴 난시와 시력저하로 안경을 쓰게 되었지만, 한동안 주상병이나 당시의 수통 입원실에서 만났던 군인환자들을 마음속에 담고 지냈다. 모두들 어디에서 어떻게들 살아 가고 있을까? 군 병원에서 목격한 그 많은 고통의 흔적들과, 밤마다 열고 닫히던 수통 정문의 육중한 문소리들이 잊혀지지 않던 수년간, 나는 주상병이 기거하던 구포역 앞 고모댁의 옥탑방에서 바라보던 낙동강의 노을이 자꾸 생각났다. 그 옥상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던 주상병의 뒷 모습도. 빛나던 한 청춘에 잠시 생채기가 났지만, 우리는 그 시절을 그래도 용케 이겨내 왔던 것 아닐까?

구포역 옥탑방.png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부산에 내려가서 나와 함께 뻬치카 그물망 작업을 했던 그 기지개를 만났다. 그리고 나이 차이는 두 살 밖에 안 나지만, 여전히 젊고 빠릿빠릿한 후임이라고만 생각했던 그의 희끗희끗해진 머리색을 보면서, 그는 나의 속알머리가 빠져가는 빈약한 머리숱을 보면서 서로 웃었다. 그리고 한 전우와 더 만나서, 그의 사업장 근처 유명하다는 부산낙지짬뽕집에서 34년만에 술없는 회식을 하면서 겨울 한 낮의 햇볕을 누렸다. (페이스북 참조: https://www.facebook.com/share/p/1YrgbaqVDd/)


정말 평안한 느낌이었다. 마치 광주통합병원의 포근한 하늘색 모포를 덮고 누워있던 때처럼. 그렇게 우리는 빡빡머리 군인에서 초로의 중년들이 되었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들이 우리의 상처들과 아픔들에 딱지가 되어 내려앉았고, 굳은 살이 되었다. 굳은 살도 내 살이기에, 이제는 아프지 않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는 표지 사진의 젊은 그 군인에게 묻고 싶다.

병원에서 자대복귀하던 눈발날리는 깜깜한 연병장, 더플백을 매고, 상처로 눈이 시려워서 눈물이 맺히던 그 혼자 걷던 길을 이제는 정말 추억할 수 있겠니? 이제는 더 이상 시린 기억이 아닌, 네가 잠잠히 바라볼 수 있는 젊은 시절의 한 장면으로 그냥 간직할 수 있겠니?


(군생활 에피소드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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