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자격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

by 진성민

아무나 만날 수는 없지만,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사람, 나는 어떠한가?


영업직무를 하면서 중요한 덕목중의 하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속에서 함께 일하면서 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일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의 관심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얼마나 조화롭게 구체화시켜서 서로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내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꼭 만나야 할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도 안 만나도 크게 상관없는 사람, 혹은 만나면 오히려 안되는 사람 등 일을 기준으로 보자면, 관계망이 너무 복잡해 지고, 자신의 이익을 기준으로 잣대가 형성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만나야 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하거나, 만나기 싫은 사람을 피하기 위해 별별 핑계를 다 대는 것은 그나마 솔직하다. 가장 어려운 것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나를 만나기 싫어하거나, 나보다 너무 높은 직위의 사람이어서 나를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것은 외국인들도 동일한 듯 하다. 내 명함의 직책이 무엇으로 적혀 있는지에 따라서,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과, 내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달라진다. 이런 현실은 마치 우리가 이마에 명함을 붙이고 다니면서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게 느껴진다. 그냥 소중하고 특별한 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삶은 과연 사회생활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과거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일반인 신청자들과 점심 한 끼 하는 이벤트를 갖는 것을 신문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수억원의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런 셀럽들과, 혹은 유명인과 같이 했다는 경험을 남기고 싶어한다. 그들의 식견과 경험을 배우고 싶어서였든지, 아니면 그 이벤트를 개인의 어떤 목적에 활용하고자 했던 것인지 상관없이, 우리는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사람과 만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사실 우리 말의 "아무나"와 "누구나"는 비슷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내 생각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아무나"에는 목적성이 없고, 동류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누구나"에는 목적성과 동류의식이 있다. 거기에는 방향에 대한 공감도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스스로부터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만날 수는 없고,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은,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 무슨 생각에서 누구를 만나고 싶어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 진다. 사회 생활에서, 직장생활에서는 주로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달라질 것이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서로의 관심사와 생각의 차이에 따라 친소(親疎)관계가 결정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끼리끼리" 라는 단어가 생긴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따뜻하고 풍부하고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차이와 끼리끼리를 넘어서려는 노력,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의 차이에 대한 좀 더 관용적이고, 합의지향적인 태도가 아닐까? 그것은 업무적인 협상테이블에서도 그렇듯이,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도 더 나은 결과를 산출해 낼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마 대다수가 이런 관점을 견지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인한 고통들도 예방되지 않았을까? 다만, 이런 생각은 너무 Naive하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알고는 있지만.


문득 떠오르는 분이 한 분 계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고 말씀하셨던 분. 그분께 나아가고 싶으면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고 하신 분. 마치 자녀들이 어렵고 힘들 때, 부모를 찾으면 한걸음에 달려와서 기꺼이 들어주고, 도와주는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계신 분. 다행히도 그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명함의 요란한 직책도, 화려한 경력도 필요하지 않다. 단지, 보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 지치고 곤고해져서 비어 있는 마음, 그것 하나면 되지 않을까? 예수님은 아무나를 지향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나를 지향하셨다고 믿는다. 목마른 자, 배고픈 자, 무엇보다도 이 지상의 현실에 목말라서 복된 소식(福音, Good News)을 기다리는자. 지금 당장 등 따숩고, 배불러서 행복한 사람들은, 그 곤고한 지경에 처한 한 마리의 양처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제사장의 옷 에봇2.png 제사장이 입던 예복에 부착되어 있는 에봇

그 옛날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들은 하나님앞에 나아가기 위해 이런 화려하고 고귀한 보석들로 장식된 에봇(Ephod)을 흉배에 붙힌 예복을 입고 나아가야 했다고 들었다. 12지파를 대표하는 12종류의 값진 보석들은 제사장의 가슴에 부착되어, 그들의 기원(祈願)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예표가 되었다. 다행히 지금 우리는 이런 값비싼 예복도, 화려한 직책의 명함도 필요치 않다. 그리고 누군가를 대표해서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갈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단지,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비어 있는 마음,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마음으로, 그날 그곳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수 있기를. 부디 우리는 서로 "아무나"가 되지 말고, "누구나"가 되어 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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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볼 수 있는 꽃잎과 새싹들이 조용히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는 인도의 봄날, 꽃구경하면서 다시 한 번 만남의 자격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올해는 또 여기서 어떻게 누구를 만나며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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