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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선 Jun 03. 2024

이사 전, 새 집 단장하기

부동산 시장의 영향인지, 에스크로가 없는 조지아 주에서 집을 사서 그런지 클로징 시간이 짧았다. 계약 후 2개월이 채 안 되어서 진짜 “집주인”이 되는 것이다. 첫째 아이의 새 학기 시작에 맞춰 이사 날짜를 잡았다. 그래서 새 집을 단장할 수 있는 시간이 한 달가량 주어졌다. 




마음을 먹고 집을 둘러보니 손보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20년 역사를 온 힘을 다해 보존하고 있는 듯한 집이었다.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1.    집의 색

세 방의 벽은 짙은 회색. 집이 좁고 어둡고 답답해 보였다. 

거실의 벽은 노란빛이 도는 아이보리 색. 촌스러웠다.

마스터 화장실은 탁한 연보라색. 응? 

화장실 2는 벽 색은 나쁘지 않았지만, 캐비닛과 거울이 청록색.


이렇게 화려한 색의 조합을 감당할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새로 페인트를 해야 했다.


2.    조명

지붕이 세모 모양이라, 가운데에 위치한 거실은 천장이 높아 확 트이고 공간이 넓어 보였지만, 가장자리에 위치한 방들의 천장은 낮았다. 그 낮은 천장에 실링팬을 달아 두어 방 천장이 전반적으로 더 낮아 보였다.

실링팬과 전등 커버의 디자인이 매우 오래됐다.

전구가 모두 노란빛이라 어두침침했다. 


안 그래도 저지대인 데다 뒷마당에 숲이 우거져 해가 잘 들지 않는 집이었다. 벽 색도 어두운데 조명도 어두우니 총체적 난국이다. 나는 해가 잘 드는 밝은 집이 갖고 싶었는데.


3.    수납공간

집의 크기에 비해 수납공간이 턱없이 적었다. 마스터 베드룸의 작은 팬트리와 작은 옷방, 좁은 부엌의 작은 팬트리, 그리고 두 아이들 방 사이에 있는 작은 팬트리가 전부. 


우리는 미니멀리스트 가족이라 아이가 둘임에도 물건이 별로 없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수납공간은 수납용 가구들을 사서 보완해야 했다.


4.    화장실

마스터 화장실은 한 번도 리모델링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샤워부스의 실리콘 부분에는 곰팡이가 슬어있고, 여기저기에 노랗게 얼룩져 있었다. 샤워부스 옆에는 애매한 네모난 공간이 남아 있었는데, 아마도 공사할 때는 변기를 넣으려던 공간인데 설계상의 문제로 넣지 못한 듯 보였다. 싱크 캐비닛은 부엌의 캐비닛과 같은 나무 재질이었고, 상판은 플라스틱 재질이라 아이보리 색이 누렇게 변색되었다. 수도꼭지는 옛날 미국식 수도꼭지 스타일로 고전적인 미가 있었지만, 아이들이 사용하기에 실용적이지 않았다. 큰 강아지가 살았는지, 화장실의 문틀에 이빨자국과 찍힌 자국이 많았고, 문 손잡이에도 긁힌 자국이 있었다.

아이들이 사용한 화장실이 그나마 최근에 리모델링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싸구려 재질의 작은 캐비닛과 싱크대를 들여놓고 바닥 타일을 (아마도 DIY로) 새로 깐 정도였다. 타일을 전문가가 깔지 않아서 그런지 한 타일이 살짝 튀어나와 있어 발가락을 찧기가 좋았고, 변기가 흔들거렸다.


마스터 화장실만큼은 꼭 리모델링을 해야 했다. 작은 화장실도 기회가 되면 타일을 새로 깔면 좋겠다.


5.    랜드스케이핑

삼각형+사각형 형태의 앞마당인데, 삼각형은 가든, 사각형은 잔디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정원이라기에는 띄엄띄엄 심어진 초라한 식물들이 안쓰러웠고, 잔디는 반이 죽어 이끼가 덮여있었다. 

뒷마당의 펜스와 덱은 후에 돈을 들여 철거를 해야 할 것 같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엄청난 돈이 필요할 것 같았다. 공인중개사는 정원을 없애고 모두 잔디로 까는 것을 추천했다. 정원은 주인이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데, 두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는 그런 노동을 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    자잘한 수리

창문 두 개가 고정이 되지 않아 열어 둘 수 없었고, 방충망이 벌어져 벌레가 들어오기 쉬웠다. 이사 오기 전 카펫 스팀 청소와 덕트 청소를 진행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이 모든 것을 손보려면 돈이 필요했다. 이미 예산을 꽉 채워서 집을 매매한지라 여유자금이 없었다. 게다가 20년 된 세탁기와 건조기를 그대로 쓸 수는 없어, 새로 구입해야 했다. 클로징 비용에 이사비까지 생각하니 할 수 있는 것은 덕트와 카펫 청소뿐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저절로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미국으로 이민을 온 25년 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페인트일을 업으로 살고 있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 아빠한테 부탁할 텐데. 이사 전까지 아직 한 달이나 남아있는데 혹시 아빠가 와서 도와주실 수는 없을까? 염치가 없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직설적으로 도와달라는 말은 못 하고 빙빙 돌려가며 부탁을 하는 나에게 아빠는 고민하는 내색을 보였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나서지 않는 아빠를 보며 서운한 마음이 일었다.

내 결혼식에도 오지 못한 아빠였다. 새아빠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할 큰 딸의 결혼식에 바다 건너 올 정도로 낯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었다. 아빠에게는 큰 마음을 먹어야 할 가격의 비행기표를 사는 것도 부담일 것이었다. 엄마는 큰 딸 결혼하는데 돈 몇 푼 쥐어주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아빠라고 힐난했지만, 아마 아빠도 그런 생각에 비행기표를 사주겠다는 딸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운했지만 동시에 안도하는 마음도 들었던 나 역시 아빠를 닮아 서운한 내색을 할 낯짝이 없었다.

그런데 서운한 마음이 한 번 물길을 트니, 묵혀두었던 온갖 서운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감정들에 아빠 대신 혼자 변명을 해주면서, 고마웠던 사소한 일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면서, 그날 나는 우울한 기분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다음 날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3일 정도 있으면서 집의 내부 페인트를 해주겠다고. 기쁜 마음에 죄책감이 더해졌다.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마치 아빠를 빚쟁이처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내가 당연히 받아 왔어야 하는 정서적, 경제적 지원을 이제라도, 늦게라도 받아내고 싶다는 욕심. 아빠는 그런 나의 마음을 느끼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빠에게 부채감으로 존재할까?

온 김에 더 있다 가시라는 권유를 한사코 물리치면서 아빠는 딱 3일 동안 새 집 페인트칠을 하고 가겠다고 우겼다. 나는 비행기표 값을 핑계 삼아 4일 동안 계실 수 있게 일정을 잡았다. 아빠에게 손주들을 보여줄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설레었다. 나도, 아빠가 조금 보고 싶었던 지도.


아빠를 기다리면서 여기저기에서 견적을 받았다. 실링팬과 전등을 다 바꾸면 최소 1000불, 덱과 울타리 철거에도 1000불, 앞마당에 잔디를 깔면 15000불…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산을 꽉 채워 집을 매매할 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나의 집이 되고 보니 집의 자잘한 단점들이 자꾸 눈에 띄었다. 마치 사랑에 빠질 땐 몰랐던 연인의 단점들이 연애 3개월에 슬슬 신경을 거스르는 것처럼. 다행인 건 여전히 나의 첫 집이라는 벅찬 감정이 그 모든 것들을 가릴 만큼 컸다는 것이다.

첫 집부터 완벽하게 갖추고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생각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천천히 바꾸어 나가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시간을 들여 내 취향에 맞게, 좋은 재료로 집을 가꾸어 나가자. 우리 가족에게 맞춘 듯한 아름다운 집으로. 그리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자잘한 일들을 했다. 집에 살충제를 터뜨리고, 카펫+덕트 청소 예약을 페인트 작업 직후로 잡았다. 새로 페인트 한 집이 어린아이들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 VOC를 걸러준다는 다이슨 공기청정기를 구입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주문했다. 




아빠가 오시자 본격적으로 집 단장을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        우리 이사 가면 네 방이 생기는데, 무슨 색이었으면 좋겠어?

-        노란색!

질문하는 나도, 대답하는 첫째 아이도 짜릿했다. 

홈디포에 가서 페인트 색을 골랐다. 엄청나게 다양한 색의 샘플카드들을 들여다보며, 이 작은 네모가 거실 벽면 하나만큼 커지면 어떤 색이 될까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금씩 채도와 명도를 달리하며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색들. 샘플지를 여러 개 들고 새 집에 와서 벽면에 대보았지만, 나에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아빠는 집을 한 번 둘러보더니, 전반적으로 하얀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 주었다. 방의 크기가 작으니 하얀색으로 칠해야 넓어 보일 것 같다고. 너무 새하얀 색은 촌스럽고, 무난하게 쓰기 좋은 색. 거실은 더 넓으니 아이보리를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하얀 페인트. 화장실은 광택이 있는 하얀 페인트를 칠해야 관리가 편하다 했다. 나는 아빠가 있어서 다행이야, 생각하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홈디포에 가서 고른 색의 샘플 페인트를 발라보고, 최종 페인트들을 골랐다. 아빠는, 가까운 곳이었으면 장비를 가져와서 천장까지 싹 페인트해줄 수 있었는데, 하고 아쉬워했다. 장비가 없다는 건 브러시 몇 개로 일일이 아빠 혼자 작업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작은 나의 새 집이 순식간에 엄청 큰 작업 공간으로 느껴졌다. 56평. 3일 꼬박 일을 해야겠다고 말하는 아빠를 보며, 미안했다. 괜히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다 갚을게! 하며 큰소리를 쳤다.


아빠는 정말 꼬박 3일을 작업했다. 새로 단장한 집은 밝고, 단정하고, 넓었다. 이제야 우리 가족의 첫 집, 새 집 같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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