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선 May 27. 2024

나의 어린 시절 집들

내가 기억하는 첫 집은 하우스집이다. 하우스는 비닐하우스를 말한다. 당시 우리가 ‘밭의 할머니’라고 불렀던 아빠의 친척 할머니에게는 인천의 교외에 작은 밭떼기가 있었다. 그 밭떼기의 옆에 긴 비닐하우스가 하나 있었는데, 토굴처럼 긴 그 비닐하우스 안에 세 개의 방이 연달아 이어져 있었다. 세 개의 방 중 가운데가 우리의 집이었고, 작은 단칸방에 네 가족이 함께 엉켜 잤다.

 워낙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어떻게 비닐하우스 안에 방이 있을 수 있었는지 구체적으로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왼편으로 길게 흙길이 나 있고 비가 오면 진창이 되어 신발이 더러워졌던 기억, 항상 방에서 나와 고무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에 가야 했던 기억이 아른하게 남아있다.


하우스집 근처에는 빌라단지들이 있었고, 나는 매일 빌라단지의 또래 친구들과 밖에서 놀았다. 나의 어린 시절 앨범을 보면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여럿 있다. 나와 내 동생은 빌라에 살던 다른 친구들보다 더 깨끗하고 질 좋은 예쁜 옷을 입고 있다. 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옷과 신발만큼은 항상 좋은 것을 사주셨다.


후에 엄마에게 물어보니, 전셋집을 옮기기 전 기간이 떠서 잠시 밭의 할머니 집에서 지낸 거라고 했다. 그래도 그 집이 이렇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래도 그때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우스집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울타리로 둘러싸인 학교의 정문이 하우스집 정 반대에 있던 지라 걸어서 5분은 걸렸다. 입학식날 엄마와 손을 잡고 초등학교로 걸어가던 길의 빈 가방은 가벼웠고 잘 다린 새 옷은 걸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학교에 도착해서 흙먼지가 날리는 모래 운동장에 줄 맞춰 섰다. 나는 1학년 1반, 일찍 도착한 데다 키가 작아서 줄의 제일 앞에 섰다. 어리둥절하고 설레었던 입학식을 마치고 엄마와 다시 집에 돌아가며, 한 명씩 빌라 단지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그 길의 끝에 있는 하우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끄러웠다. 나도 줄지어 서있는 그 빌라들 중 어딘가로 들어가고 싶었다. 나의 첫 부끄러운 기억이다.

왼편의 빌라단지, 오른편의 초등학교 울타리.

 

곧이어 이사 간 곳은 큰 길가에 틈새처럼 나 있는 좁은 골목에 있던 셋방이었다. 현관을 지나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곳에 첫 번째 셋방이, 작은 마당을 지난 구석에 두 번째 셋방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셋방 2에서, 우리보다 더 가난했던 아빠 친구 지영이네는 셋방 1에서 살았다. 셋방 2의 건너편에는 돌로 만들어진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주인집인 벽돌집이 나왔다. 계단에서부터 분위기가 확 달랐다. 계단 중간층은 다양한 화초들이 담긴 화분들이 빽빽이 놓여 마치 작은 정원 같았다. 빨간 벽돌의 주인집은 마당과 셋방 2개를 합친 만큼 컸다. 딱 한 번인가, 그 집의 병약한 아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아들의 초대로 처음으로 주인집을 구경하며, 동생과 나는 부러움에 “아저씨 좋겠다!” 하고 외치며 집 안을 뛰어다녔다. 아마도 20대 초반이었을 그 오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너네가 더 부럽다, 하면서.

주인집 계단에서.

지영이네 셋방은 그저 단칸방이었던 것에 비해, 우리 셋방은 그나마 큰 크기의 방이 미닫이 문으로 가운데가 나뉘어 있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단칸방은 아닌 셈이었다. 그리고 그 방에 작은 부엌이 딸려 있었는데, 방보다 조금 낮은 부엌에서 연탄불을 때워 방을 데웠다. (레인지가 있었던가?) 두 칸으로 나뉜 방을 가진 덕으로 한동안 엄마는 여동생인 이모와 띠동갑 막냇동생을 데려올 수 있었다. 우리 네 가족은 윗방에서, 이모와 삼촌은 아랫방에서 거취 했다. 삼촌이 술에 취해 아빠에게 술주정을 해, 쫓겨나듯 집에서 나오게 된 이후에도 네 가족이 다 함께 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서로 엄마 옆에서 자겠다고 매일 밤 동생과 싸워 결국 엄마가 한쪽에는 나, 다른 한쪽에는 동생을 끼고 잤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우리에게 그 어두운 셋방에는 놀 것이 별로 없었다. 지영이와 동갑임에도 성격이 잘 맞지 않아, 항상 동생과 단 둘이서 놀았다. 아빠가 마시고 마당 한편에 쌓아둔 소주병을 기어 삼고 빨간 다라야를 핸들 삼아 자동차 놀이를 했다. 하나밖에 없는 빨간 다라야를 내가 양보하지 않아 동생은 세숫대야를 가지고 나와 내 옆에 앉았지만, 금세 싫증을 내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시시해졌다. 그 놀이가 시시해진 만큼 내 마음도 어둑어둑해졌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부엌에서 쥐가 나와 엄마가 소리를 질러대며 하얀 연탄을 집어던졌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새 연탄을 집어던지지 않은 우리 엄마. 그래도 쥐가 죽지 않아 엄마는 연탄집게로 쥐를 때려잡았다. 하얀 연탄재를 뒤집어쓰고 죽어 있는 쥐의 벌어진 입에 작고 뾰족한 이빨이 촘촘했다.


마지막 기억은 아직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동생과 병원놀이 인형의 집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하게 번듯한 장난감이었다. 커다란 병원 집과 남자 의사, 여자 간호사 마론 인형이 딸려 있는 세트. 우린 여느 때처럼 서로 간호사 미미를 하겠다고 싸웠다. 인형을 붙잡고 서로 잡아당기면서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와서 인형의 집을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플라스틱 병원 집은 마당의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부서졌고, 동생과 나는 엉엉 울었다. 그렇게 처참하게 운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다. 바닥에 부서져 널브러진 병원 집을 치우라고 엄마가 화를 내서, 동생과 울면서 플라스틱 조각들을 주워 날랐다. 그날은 거의 하루종일 울었다. 밤에 잠들면서도 “너 때문이야.” 서로를 탓하며. 병원 집이 없는 의사와 간호사는 더 이상 재밌지 않았다. 우리는 의사 남자 인형의 머리를 다 잘라 버렸고, 간호사 미미의 머리도 곧 사인펜으로 얼룩덜룩 염색해 주고는 마음에 들지 않아 다 잘라버렸다.  



이 셋방집에서 엄마는 최선을 다해 돈을 벌었다. (그 시절 우리는 부유한 아이들 못지않은 옷을 입고 있다. 가죽점퍼에 코르덴바지, 스티커 귀걸이.) 그리고 그 돈을 모아 우리 가족은 드디어 아파트로 이사 갔다.


5층 아파트의 꼭대기가 우리의 새 집이었다. 평수는 작았지만 방 세 개에 번듯한 화장실과 부엌이 있는 전형적인 아파트집이었다. 새 집에 들어가면서 생긴 첫 “우리 방”에는 비싼 원목 책상이 들어오고, 부엌에는 4인용 식탁이 들어왔다. 부엌 뒤 베란다에서 창밖을 보면 하늘이 마주 보였다. 나는 그 집에서 밤하늘색이 검은색이 아님을 처음 알았다.


집이 좋아진 만큼 엄마 아빠의 사이는 나빠졌다. 내 인생의 가장 어두운 기억들이 이 집에서 만들어졌다. 지긋지긋하고 무서웠던 날들이 지나가고, 결국 이 집에서 엄마 아빠가 갈라섰다. 5층 아파트집은 우리 가족의 공식적인 마지막 집이 되었다.

 


내 어린 시절의 집들은 그래서 모두 좁고 어둡고 답답하다. 그 이후에도 한동안 우리는 해가 잘 들지 않고 어두운 집들을 전전하며 살았다. 어떤 때는 엄마와 어떤 때는 아빠와 사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집들을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 가족의 첫 집은 무조건 행복한 집이어야 했다.




우리 네 가족의 첫 집. 앞마당과 뒷마당이 넓은 단층집. 거실이 넓게 트여 있어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집. 밝고 환하진 않지만, 해의 움직임을 따라 빛이 거실을 가로지르는 집. 아이들의 놀이방과 책방이 있는 집. 하루 종일 새소리가 들리는 집. 우리 아이들의 기억에 첫 집은 바로 그런 집이다.

이전 01화 인생 첫 집을 매매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