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

아무도 없는 숲, 김이환, 미메시스 (2018)

by 클레어

선택된 죽음과 강요된 죽음

나의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 나의 죽음을 나의 방식대로, 나의 순서에 맞추어 치른다는 것. 그 선택을 위해 박서윤이라는 젊은 여성은 피폭 지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피폭 지대로 들어간다는 선택 자체가 죽음에 대한 확고한 결정을 암시한다. 그 지대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고,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삶의 가능성이 점점 낮아져 결국은 죽음을 원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

그런 곳에서 그녀는 어린아이를 발견한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음의 경계에 서 있게 된 아이. 아이는 오롯이 피해자로 존재한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이 없는 피보호자인 아이는, 그저 죽음으로 내몰린 상태다. 그리고 가해자는 아이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가진 아버지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기 위해 피폭 지대로 들어온 서윤. 그녀는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상실한 채, 자신에게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아버지를 따라온 아이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아이는 자신의 정반대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당화된 분노

그래서 서윤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비록 실패했지만) 살인까지 감행한다. 이미 자신의 죽음을 결정한 남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자는 ‘너의 죽음을 결정한’ 가해자일 뿐이다.


그녀가 남자에 대해 갖는 분노는 자기가 치르려 하는 죽음이라는 의식을 명분으로 삼아 살인을 행하려 하는 악에 대한 분노다. 그녀가 자살로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것과 아이를 구하려는 것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의지를 존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방과 일관된 결말

물론 남자가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라고 해서, 서윤이 그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서윤이 남자를 떠밀고, 남자가 결국 마지막 선택을 하게 한 것은 서윤을 도덕적·윤리적 책임에서 어느 정도 해방시켜 준다.


아이가 구해지고, 마지막에 서윤이 자살을 하는 결말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일관적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결국 모두가 자신의 삶과 죽음의 결정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변주를 통한 주제 강화

다만, 여기에서 변주는 두 번째 남자에게서 벌어진다. 자살 시도를 하다 마음을 바꾸어 살려 애를 썼지만, 남자의 방해로 인해 결국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남자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두 번째 남자는 살았을 것이므로 이는 명백한 살인이다.


자신의 아이와 두 번째 남자가 죽어야 한다고 결정하는 그 자체가 남자를 이 글의 빌런으로 만든다. 그리고 서윤과 남자의 대비가 삶과 죽음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글의 주제를 더욱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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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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