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이창현, 사계절 (2018)
이 책, 재밌다.
B급 개그와 원초적인 몸 개그에 약한 나는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무간도 패러디는 아무래도 작가의 취향이겠지. 마지막엔 MI6와 CIA, 나체 중독자와 기타리스트까지 등장해 당황스럽긴 했지만, 뭐, 그 또한 매력이라면 매력.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노마드’. 자기계발서를 주로 읽는 인물인데, 참 짠하게 다가왔다.
사실 나 역시, 예전에는 자기계발서를 좀 깔보는 쪽에 가까웠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숀 코비의 『성공하는 10대들의 7가지 습관』 이후, 자기계발서는 한 권도 읽지 않았고, 오히려 그 장르에 대한 불신을 품게 되었다. 감동을 받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실망하면서.
그러다 재작년 즈음부터 다시 자기계발서를 집어 들기 시작했다. 대개는 ‘부자 되는 법’에 관한 내용들이었지만,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문학을 공부했던 사람 특유의 허세와 시니시즘에서 벗어나 좀 더 나 자신에게 관대해졌달까. 독서라면 문학과 철학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시야도 조금은 넓어졌다.
이 책은 그런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책 속 독서 중독자들은 거리낌 없이 자기계발서를 무시한다. 문학이라면 고전만을 이야기하고, 철학이라면 시간의 검증을 거친 대가들의 이름만을 꺼낸다. 그런 그들과 그 무리에 끼고 싶어 하는 노마드 모두가 희화화된다. 그래도 작가의 시선은 살짝 ‘게 편’인지라, 노마드의 모습이 좀 더 우스꽝스럽고 재미있게 그려진다. 그가 책을 읽는 방식, 독서 중독자들에게 접근하는 방식마저도 자기계발서적인 데서 오는 아이러니는 꽤 유쾌하다.
책 속엔 좋은 책을 고르는 팁도 소개되어 있다. 독서 중독자만큼이나 책에 진심인 사람들이 또 있을까. 덕분에 나도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소소한 습관과 방식들도 귀엽게 묘사돼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특히 공감했던 부분은 ‘병렬 독서법’.
나도 동시에 6~7권을 읽는 편이다. 관심 분야가 다양하고, 상황에 따라 종이책과 전자책, 영어 원서와 한국어 책을 번갈아 읽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하나의 ‘독서법’으로 소개되다니, 괜히 반갑고 신기했다. 이 방식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으니, 책에서 언급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 병렬 독서법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나는 독서 중독자의 축엔 끼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그나마 확고하던 취향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흐릿해졌다. 철학 서적과 고전 문학을 주로 읽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하루의 시간을 쪼개 실용서와 가벼운 소설들을 겨우 읽는 수준. 깊이 없는 독서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책이 남긴 메시지 하나는 뚜렷했다.
“인생은 짧고, 남은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정말 좋은 책을 잘 골라 읽자.”
나의 독서가 힘을 잃은 이유는, 어쩌면 산만하게 중심 없이 책을 골라 읽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독서가 생각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 독서에서 파생된 또 다른 독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책과 책 사이에 맥락이 생겨야 한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
그래도 지금껏 읽어온 책들이 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 모든 독서 경험은 나의 뇌를, 사고의 방식과 깊이를, 분명 조금씩 변화시켜 왔을 테니까. (이 부분에선 리사 제노바의 『기억의 뇌과학』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독서에 대한 책’을 읽고 나니, 독서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독서를 주제로 한 책, B급 개그, 허세 가득한 사회 부적응 독서가들에 대한 풍자가 유쾌하게 어우러진다. 이런 요소들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