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니고, 글 쓴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삶 자체가 진정한 나다.” 이 말을 종종 떠올리게 된다.
만약 내가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시험은 백점을 받아야 한다”거나 일등급을 요구하고, 일등급 안에서도 또 극상위권을 바라며 기준을 숫자로 제한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마치 아이에게 “너는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라” 혹은 “내가 투자한 만큼의 결과를 가져오라”는 식의 경제논리와 관료체제를 가정에서 내세우는 부모가 되고 말 것이다.
어른의 삶의 가치 기준이 경제적 논리로만 가득하다면, 사실 행복한 사람이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식과 재물 그리고 권력은 중독적이어서, 만족을 멈추는 순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찾아 끝없이 헤매게 되기 때문이다.
말을 잘하는 언변가, 강연가, 상담가 모두가 스승이다. 그러나 부모는 스승이며 아이에게 표본이라서 말로 대신되지 않는 부분들의 연속이었다. 좋은 말을 해주면 아이들의 마음 문이 활짝 열리는 사춘기가 아니다. 말보다 강력한 관계가, 믿음이 확고히 세워져 있어야 좋은 말이 의미가 있다.
부모의 컨디션 따라 짜증 섞인 말로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거나, 신경이 늘 곤두서서 눈치 보는 아이라면 부모와의 정상적인 소통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른다운 모습의 부모라면 반드시 규율이 있고 질서 안에서 훈육을 하되 다그치지 않는다. 먹는 음식이 편식되면 왜 우리 몸이 병드는지, 건강이 왜 중요한지,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며 모든 것을 놀이로 접근한다. 눈높이에 맞춰진 자연스러운 소통이 끊임없이 주고받아져야 십 년 뒤 지금의 사춘기에 대화의 창구가 열리게 된다.
십 년간 막힌 창구라면 온갖 말을 부어도 소리가 가슴으로 전달될 리 만무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부모는 어쩌면 가슴으로 닿은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의 민낯을 공유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수 있다. 실수한 부모님의 어린 시절, 그리고 성장한 나의 솔직한 경험담, 그래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이것이 바로 훈육의 시작이다.
가르침이 교훈하면 진정한 의미의 훈육이 된다. 강제로 누르고 “따르라” 소리치면 그것은 소음이 된다.
소음과 훈육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하는 내 아이들이 옳은 가치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자기를 비롯해 만나는 사람을 존중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핵심이 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인격은 모두 격이 다르다. 생김새가 다르듯 개성이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어디서든 존중받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다듬어지지 못하거나 애정이 부족해서 모순된 정서, 다양한 모습의 숨겨진 모난 곳을 사회에 나와서 이리저리 깎이느라 애쓰다 정작 지켜야 할 자존감이 무너지게 되는 사람도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철든 시기에 따라 둘 다 경험할 수도 있다.
질풍노도, 자아성찰, 사춘기 아이들은 우리 가정에서 잘 빚어진 모양은 내 삶 그 자체였다. 나의 모습이 아이들의 모습에 그대로 투영되고 반사되는 것을 보며, 사춘기에 맞닥뜨린 크고 작은 어려움은 어쩌면 그동안 내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한 어떤 부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