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품은 수줍음, 시클라멘

by 모즈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어느 시대로 가 보고 싶으세요? 저는 주저없이 19세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미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카메라의 발명과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의 전래 등으로 무척 다양한 이즘이 생겨나기 시작했고요, 산업 혁명이 일어나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도시의 모습도 하루가 다르게 바껴요. 당시의 생동감을 온전히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종종하는 상상 중 하나랍니다.

하지만 19세기는 꼭 축복의 시대라고는 할 수 없을 거예요. 어느 시대건 흐름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존재하니까요. 특히 당시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기계 문명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기존의 전통이나 가치관이 무너지며 사회에 대한 불신과 개인적인 불안도 커져요.

한편, 이렇듯 부정적인 사회의 모습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요 이를 데카당스 운동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문학가들에 의해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은 차차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세련되고 화려한 색채, 현실에서 도피한 신비주의적이고 다소 퇴폐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1905년, 다리파(Die Brücke)를 결성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는 독일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입니다.

'다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과거와 현재, 문명과 비문명을 잇는 독특하고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추구 했어요. 판화 작업도 함께 했던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목판화 기술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원시예술 등도 함께 작품에 녹여내는 시도를 합니다. 이후 베를린으로 이주한 키르히너는 급변하는 대도시의 에너지와 소외감에 매료되었어요. 그는 베를린의 번화가, 특히 포츠다머 광장과 같은 장소를 자주 스케치하며 도시의 활기와 긴장감을 포착했습니다. 그의 "베를린 거리 장면" 시리즈(1913~1914)는 강렬한 그의 색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스크린샷 2025-08-07 오후 10.19.41.png Berlin Street Scene, 1913 출처 wikiart

각지고 날 선 모습, 서로의 시선을 회피하는 듯한 모습에서 인간의 고독과 불안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라는 광기


1914년 키르히너에게 불행이 찾아 옵니다. 어쩌면 이 불행은 인류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겠죠. 바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입니다.

키르히너는 징집되어 전쟁터로 향합니다. 그는 이 곳에서 극도의 긴장과 공포를 느껴요. 원래부터 정서적인 불안이 있던 그는 지옥과도 같은 전쟁을 몸소 겪으며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회복이 어려울 만큼 영혼이 망가지느 그는 결국 입대한 이듬해,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귀향합니다.

스크린샷 2025-08-07 오후 10.33.11.png Self-Portrait as a Soldier, 1915 출처 wikiart


이 무렵의 자화상을 보면 그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어요. 군복을 입채 두 손이 잘려진 모습은 예술가로서 존재를 부정 당했다는 메세지를 보내는 것만 같아요. 전쟁이 한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한 것이죠. 이러한 그를 걱정하던 몇몇의 친구들과 치료를 맡았던 정신과 의사의 권유로 키르히너는 스위스 다보스의 한적한 시골 마을로 요양을 떠나게 됩니다. 다행히 그는 이 곳에서 안정을 찾기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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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Female Rider 1931, 우 Great Lovers 1930 출처 wikiart


다보스 시기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안정을 찾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색채는 화려해 지고, 날카롭던 여러 겹의 직선은 사라져 곡선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러한 그의 그림은 훗날 팝아트에도 영감을 주게 돼요. 물론 이렇게 되기 까지에는 십 여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어요. 다보스는 그에게 평안을 준 선물같은 곳입니다.


두 번째 상처


하지만 이런 평안은 곧 산산히 깨지고 맙니다. 1930년 초에 집권한 나치는 키르히너의 그림을 '퇴폐 예술'로 낙인찍고 조롱합니다. 이러한 망신주기는 일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이어집니다. 결국 '퇴폐 미술전'을 열어 키르히너의 그림을 전시한 후 훼손하고 불 태우기 까지 합니다. 이렇게 파손된 그의 그림이 무려 600여점에 이릅니다.

키르히너는 다시금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가까스로 붙잡았던 그의 정신은 또 다시 무너집니다. 국가는 그에게 두번의 상처를 주었어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는 이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1938년 다보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비록 국가가 휘두른 권력에 무너져 버렸지만 키르히너는 예술가로서 소중한 흔적들을 많이 남겼어요. 특히 실험적인 그의 색채와 단순화된 곡선은 분명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시도들이었습니다. 또한 연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스스로는 무던히 이겨내려 노력했던 사람이예요.

그는 '시클라멘'을 닮았습니다.


독을 품은 수줍음, 시클라멘


다보스 시기, 키르히너는 이 곳의 자연 풍경과 더불어 들판과 바위 틈에 핀 꽃들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요. 번잡했던 베를린이나 하루도 빠짐 없이 폭격이 자행되던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었던 행복이었어요. 수줍음이 많던 키르히너는 어느 정도 마을 사람들과 친분이 쌓이자 들판에 핀 꽃들에 대해 물어 봅니다. 사람들이 그 꽃이 '시클라멘'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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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시클라멘은 꽃잎이 뒤로 젖혀진 형태를 띠며 마치 나비가 날개를 펼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색상은 흰색, 분홍, 빨간색 그리고 보라색 등 무척 다양해요. 그리고 특이하게도 가을에 꽃을 피워 다음해 초봄까지 개화 상태를 유지합니다.

맞아요. 시클라멘은 겨울을 견디는 꽃이예요. 분화 형태로 실내에 둔다면 낮은 온도와 건조한 날씨에도 너끈히 버틸 수 있습니다. 나비의 날개처럼 연약하게 생긴 꽃에서 어떻게 이렇게 강인함이 나오는지 놀라울 따름이에요. 그 뿐인가요. 시클라멘은 구근 식물이예요. 이 알뿌리에는 약한 독성 물질이 있어 섭취하게 되면 복통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Alpenveilchen, 1918.png
Weisse Cyklamen in schmaler Vase, ca. 1934.png
좌 Alpenveilchen, 1918 우 Weisse Cyklamen in schmaler Vase, 1934 출처 wikiart


물론 키르히너가 시클라멘의 이러한 식물학적 이유를 들어 이 그림을 그렸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가 이 그림을 그릴 때의 마음 만큼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환청과 환각,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이것을 이기려 시클라멘을 그렸어요. 비록 그릇된 공권력에 의해 꺾이긴 했지만, 꺾이는 순간에도 독과 오기를 품으며 더 나은 세상에서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를 보였을 것 같아요.

저의 희망대로 그리고 키르히너의 바람대로 나비 처럼 훨훨, 평온한 그곳에 닿아 마음껏 작품 세계를 이어 가길 마음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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