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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앤온리 May 18. 2023

떠나버린 연인과 직장 성과평가를 대하는 자세

 - 직장에서 예상치 못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을 때

‘협상력이 다소 떨어짐’


어느 해 팀장님으로부터 받은 평가 의견이었다. 회사에서는 매년 초 이전 해 성과에 대한 전 직원 평가가 실시되었다. 팀원평가는 팀장님이 팀원 한명한명에 대해 시스템에 입력했고, 평가가 확정된 뒤에는 각자 본인이 받은 점수 및 의견을 시스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해 나는 낮은 점수의 평가를 받았고, 평가 의견에 저렇게 단 한 문장이 기재되어 있었다.  ‘협상력이 다소 떨어짐’이라고..


우선 평가 점수를 낮게 받은 것에 대해 기분이 그닥 좋지는 않았다. 누구든 어느 이유에서든 회사에서 한 해 성과에 대한 평가점수를 낮게 받으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당시 이렇게 낮은  점수를 받을 만큼 일을 못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했었다. (혹시 착각이었나..) 


하지만 매해 평가는 온전히 개인의 성과에 따라서만 이루어지는 않았다. 팀원들 모두 다 열심히 일하고 좋은 성과를 냈다고 해도 모두에게 최고 점수를  줄 수는 없기 때문에 성과 외에 몇 가지 상황적 요소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이전에도 성과가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낮은 점수를 받았던 사람이나, 올해 진급 대상인 사람에게 좋은 점수를 우선적으로 주곤 한다.


이렇게 성과 외에 여러 이유가 반영됨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수가 낮아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기분이 안 좋았던 이유는 평가 의견 때문이었다. 협상력? 당시 나의 업무에서는 협상력을 보여야 하는 업무가 내 기억으로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왜 팀장님이 협상력에 대해 평가하고 그것도 부정적인 의견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무슨 협상을 했었는지 과거의 일들을 기억 속에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다가 문득 평가실시 얼마 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연말에 사무실 공간 조정이 있었다. 당시 건물 내 전체 공간 부족으로 인해 우리 팀이 기존에 쓰던 공간을 축소해서 다른 팀과 나눠 쓰는 것으로 배정받았다. 배정받은 공간의 평면도를 보니 넓이가 너무 축소되어 사람이 책상사이로 지나다니기도 어려워 보였다. 


보통 이런 경우는 팀장님이 담당부서인 총무팀에 가서 이의를 제기하고 공간 확대를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때 팀장님은 나에게 그 역할을 시켰다. 총무팀과 협상해서 공간을 더 넓게 받아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정해진 크기의 공간을 다른 팀과 나눠 써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즉 우리 팀에 배정된 공간을 넓히려면 이웃팀이 그만큼 공간을 희생해야 했다. 그래서 총무팀과 이웃팀 팀장님과 나는  삼자대면으로 치열하게 공방했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공간 확대는 받아내지 못했다. 이에 팀장님은 못내 아쉬워했다. 


문득 이때의 일이 떠오르면서 혹시 ‘낮은 협상력’ 평가를 받은 이유가 이 일 때문인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더 안 좋아지고 화까지 났다. 나는 나름 팀장님 대신 우리팀을 대표해서 총대를 메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러 갔으며, 비록 원하던 만큼은 아니지만 공간 확장도 조금 얻어냈는데 설마 이것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았다고? 게다가 이 일은 나의 작년 업무 성과와는 거의 무관한 일 아닌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설마 정말 이 일 때문인가 싶어 팀장님께 면담 요청을 했다. 그렇다. 나는 무엇인가 해결되지 않고 답답하면 못 견디는 성격이다. 궁금한 건 물어야 했고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 했다. 


그래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팀장님, 이번 제 평가를 보니 협상력이 다소 떨어진다고 의견 주셨던데요 혹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유를 알려주시면 앞으로 제가 업무하면서 그 부분을 개선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팀장님이 뭐라고 대답했을까? 잠시 5초간 한번 예상답변을 상상해 보시라. 나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대답이 나왔다.


“그래? 내가 평가의견에 그렇게 썼어? 글쎄, 난 모르겠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이게 다였다. 헐. 이 평가의견 때문에 끙끙대고 고민했던 며칠간의 시간이 너무 허무해졌다. 그렇게 기억도 못할거면서 왜 그렇게 의견을 쓰셨을까. 팀장님과 대면하기 전보다 더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의미 없이 면담을 끝내고는 속으로 화병이 생길 것 같았다.


며칠 후, 옛날 팀장이면서 엄청 존경하던 상무님이 우리 사무실로 출장을 왔다. 반가움에 상무님과 차 한잔 하다가 평가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울분에 쌓여 앞서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속에 쌓인 말들을 다 쏟아낼 때까지 조용히 들어주던 상무님은 나의 하소연이 끝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임과장, 많이 속상했겠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가 팀장으로부터 평가 잘 받으려고 회사다니는거 아니잖아. 임과장이 모시는 CTO와 회사를 위해, 그리고 스스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기 위해 일하는 거잖아. 임과장이 일 잘하는건 나도 알고 팀원들도 알고 모두가 다 알고 있어. 그러니 평가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더 큰 그림을 보면서 일했으면 좋겠어.”


상무님의 이 말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명의 평가가 나란 인간의 절대적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어떤 학생이 학교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그 학생 자체의 가치나 존엄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명으로부터 안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나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정말로 일을 잘 못해서 객관적으로 그런 평가를 받은 것이라면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경우도 누구 한 명으로부터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회사에 더 공헌하기 위해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매년 받는 평가 점수나 의견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혹시나 회사에서 나를 은근히 내보내고 싶어서 일부러 최저 등급의 평가를 주더라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좌절하면서도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이유, 그 본질은 회사에 공헌함으로써 나 스스로 만족하고 성장하기 위해서이지 평가점수를 잘 받기 위함이 아니니까.  


나 싫다고 떠나버린 연인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듯이, 나 별로라고 결론 내버린 평가결과를 더 이상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이별을 경험 삼아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듯이, 안 좋은 평가를 경험 삼아 더 성장하면 되니까. 물론 눈물 한 방울과 소주 몇 잔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헤어진 연인과 평가 결과가 나의 존엄성을 흔들게 두지는 말자. 브라보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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