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 - (1)
한참이나 응시하던 불빛을 피해 눈을 감고 반대로 돌아 누워 베개에서 들려오는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용한 방 안에서 들리는 심장소리는 온갖 잡생각에 파묻힐 뻔했던 나를 건져 주었다. 잠을 자려고 노력할수록 평소에 잘 떠올리지도 않던, 별 시답잖은 생각까지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피곤함, 허기짐과 같은 육체적인 자극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에 한쪽귀를 베개에 지그시 밀어 넣고 일정한 박자감의 심장소리를 들으니 잡생각과 걱정이 사라지고 박자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참이나 박자에 집중하여 잠이 찾아오나 싶었지만 낯설고 어색한 곳에서 이러고 있으니 신경만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었다. 천장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 휴대폰 화면을 켜서 배 위에 얹고 천장에 반사된 빛을 먼저 적응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극이 천장으로 쏘아졌고 방구석구석을 덮고 있던 검은색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찾아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까지 3시간이 넘게 남았지만 꼬르륵하는 소리가 점점 짧은 주기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실없는 생각이지만, 어제 조식을 먹었던 식당을 떠올렸고 식당까지 가는 길과 첫 번째 접시를 채우는 동선을 그리며, 자리에 앉아 접시를 바라보고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드는 상상까지 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셀프 먹방을 찍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처럼 과식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벼운 다짐을 하면서도 어제 먹으면서 느꼈던, 비교적 덜 맛있는 메뉴들을 빼고 정말 마음에 들었던 특정 메뉴 몇 가지를 더 먹어야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였다.
머나먼 나라 독일까지 와 불 꺼진 방에서 혼자 휴대폰이나 보며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이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았다. 특별히 한국의 누군가와 업무상 중요한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아까 이불 위에서 기절하기 전에 찾아보던 독일, 뮌헨 여행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는 것도 아니었기에 얼른 침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불을 박차고 옆침대까지 굴러 기지개를 켰다.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던 슬리퍼를 찾아 신고 손바닥이 천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최대한 팔과 다리를 뻗었다. 경직되어 있던 몸의 긴장이 살짝 풀어지자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반쯤 걷고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무서운 열기가 들이닥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새벽공기는 적당히 시원한 바람과 함께, 갑갑했던 방 안의 공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내밀어 1층의 벤치를 바라보니 가로등 불빛만이 조용히 앉아 해가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
방이 바라보고 있는 건물 방향의 집에서 내 방의 불빛이 혹여나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창문을 열어둔 채로 커튼을 모두 쳤다. 물론 방의 불을 모두 키더라도 커튼을 걷었을 때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방을 더 밝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밝기가 전부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새벽에 혼자 궁상떠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솔직한 이유였다.
한 번도 튼 적 없는 TV 쪽으로 걸어가 그 아래에 있는 의자 위에 걸쳐 두었던 옷들을 침대 위로 대충 던졌다. 책상 위에는 어제 전시회장을 돌아다니며 받은 팸플릿과 볼펜과 같은 기념품들로 어질러져 있었고 어제 마시다 냉장고에 넣지 못한 물병이 놓여 있었다. 보통 차가운 물을 마시는 걸 선호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물병을 들고 차가운 유리병의 냉기를 대신 느꼈다. 엊그제 체크인할 때 받은 물은 총 3병인데 모두 두꺼운 유리병이었다. 어제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숙소도 돌아와서는 씻기 전에 냉장고에서 1병을 꺼내 그 자리에서 모두 마셨다. 집에서는 투명한 유리잔에 시원한 물을 따라 마시는 습관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냥 바로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물을 마실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물론 어제 마트에서 사 온 물은 페트병에 담겨있었지만 한국과는 다르게 유리병에 물을 담아 판매하고 있다는 게 그냥 신기하기도 했고 이곳에서 내 습관과 유사한 방식으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노트북을 열고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적인 것들 뿐 아니라 평상시에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까지, 쭉 생각을 나열해 보았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떠오르면 찾아보고… 찾아보기까지만 했다. 사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막 생산적인 일들을 할 만큼 내가 부지런한 사람이 아닐뿐더러, 시차적응 못한 신체리듬으로 정신이 뚜렷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한 변명으로 ‘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머릿속을 스스로 헤집고 다니다 뜬금없는 기억이 떠오르면, 지금 이곳의 기분을 기억에 묻히기 위해 한참이나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간혹 어떤 기억이나 추억이 떠올릴 때, 특별한 기분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그런 뜬금없이 떠오르는 것들이 참 좋다. 그런 기분에는 그날의 날씨, 냄새, 누군가의 표정, 분위기, 나의 감정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그 기억이나 추억들을 굉장히 특별하고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가끔 일부러 그런 기억들을 만들기 위해 지금처럼 억지로 기분을 묻혀버리곤 한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일부러 만들어낸 기억들은 일부러 했다는 기억마저 남아 자연산 아닌 양식의 맛을 느끼게 된다. 역시 뭐든 자연산이 최고다.
시간은 흘러 커튼 아래로 햇빛이 하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선에 잠깐 시선을 빼았겼다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닫고 시간을 확인했다. 5시 48분. 아주 적당한 시간이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아침식사를 맞이할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지하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제 식당에 들어갈 때 입구 한쪽에 서있던 직원분이 몇 호실인지 확인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자연스럽게 그분에게 아침 인사를 가볍게 건네며 내가 묵고 있는 호실 숫자를 짧고 당당하게 불러주었다. 누가 옆에서 보았으면 이 호텔에서 장기간 투숙하고 있는 손님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님 말고.
미리 시뮬레이션해 둔 메뉴들로 접시를 채웠다. 접시는 평평한 타입과 오목한 타입이 있었는데, 어제는 잘 모르고 평평한 접시만 사용하는 바람에 이것저것 담기 조심스러웠는데 오늘은 오목한 접시에 안정적으로 충분한 양을 담을 수 있었다. 물론 여러 번 담아 오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맛있는 건 한 번에 많이 먹어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오늘 아침은 좀 더 특별했다. 어제 눈치 보여 마시지 못한 샴페인을 오늘은 마셨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앉은자리는 샴페인이 담겨있는 아이스 버킷 바로 뒤였다. 가까운 위치에 있다 보니 아침을 먹으며 두 잔이나 마셨다. 아침부터 술을 입에 댄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처음 방문한 이곳 독일에서 새로 경험하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에 또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