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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27. 2019

[편지] 정확하게 실패한

언니에게

그래서 나는 writing club에 와있어.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동네 카페에 함께 모여서 글을 쓰는 모임이야. 25분 글을 쓰고 5분 휴식, 다시 25분 글을 쓰고 5분 휴식을 갖는, 뭐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써도 되고, 뭘 썼는지에 대해 전혀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글쓰기 모임. 


집을 나온 지 20일이 되었을 때 가장 그리운 것이 내 kitchen이라면, 언니는 이해하려나. 

이틀 째 자전거를 타지 않았어. 내가 일하는 카페는 시티에 있고, 카페에서 새로 이사 간 집까지는 자전거로 30분 거리야. 비가 오고 추워진 날씨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싶지 않기도 했고, 영학이가 그리웠거나 ‘내 부엌’이 그리워져서 그만 내 집에 눌러앉고 싶어졌을지도 모르지. 


'집 밖'에 있으면서 '집 안에서의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쳐다보는 일들을 했어. ‘집에서의 나’는 대부분 그와 함께인 모습으로 그려져.  

그 '나'는 소유욕이 강하고, 따라서 조그마한 뉘앙스에서도 질투심을 곧잘 불러들여. 그 '나'는 자기 중심적으로 연인을 이해하고, 자기 중심적인 가치관을 연인에게 은근 강요하는데에도 거부감이 없어. 배려심이 없다는 말이야. 그 '나'는 연인의 작게 식은 눈빛에마저 상처받길 잘하고, 받은 상처에 대한 보복을 받드시 해내야하는, 아주 거칠게 해내야하는 몹쓸 자존심의 소유자야.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아.

(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그녀를 정확하게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

정확하게 사랑받는 것이 그를 소유하는 일과는 다른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정말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부엌이 그리워서 찾아간 내 집에서 그와 김치 전골을 만들어 먹었어. 음식은 위로잖아. 여기서 먹는 한국 음식이, 정말 한국 맛이 날 때는 더한 위로가 돼. 가만히 놔두면 곧 썩을 태세인 애호박을 맛있게 처리할 수 있어서, 아무도 찾지 않아 폭삭 쉬어버린 김치에게 그것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신맛을 입게 해줘서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관계란 건 썩기도 쉽고 쉬어버리기도 쉬워, 너무나.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찾지 않으면, 가만히, 놔둬버리면, 김치 전골을 함께 먹을 수가 없어. 김치 전골을 먹으면서 오늘이 어땠는지 물을 수도 없고, 그걸 물으면서 그 사람 눈을 쳐다보면서 웃을 수도 없고, 맛있지? 너무 맛있다!하고 같이 기뻐하는 것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가출을 마감하기 며칠 전의 월요일이였어. 나 혼자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삼십분을 울었어. 꺼억꺼억 소리를 내면서.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 너는 내가 다른 아무 여자에게 한마디 친절을 말하는 것도 질투나잖아. 아니 너는 그래.' 내가 얼마나 독점적인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중에, 그가 내게 한 말이야.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얼마나 독점적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고 싶은지, 하마터면 가지고 싶은지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은 아마 내 가정환경과 관계가 있을 거라며 진지하게 말하던 중이였지. 나는 일종의 고백을 하고 있었던 거야. 고백같은 변명을. 나는 이렇게 못난 사람이야, 네가 좋은데 너를 어떻게 잘 좋아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래, 결국엔 네가 좋아서 그런거니까 네가 나를 조금만 이해해줄 수 있겠어?, 같은.

피곤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며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고 말하는 그 애의 눈빛을 읽는데, 그 애는 다시 한 번 나의 질투에 대해서 말했어. 내 질투에 대해, 그가 만난 다른 여자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마음들에 대해, 그것에 지쳤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했어.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진절머리가 날만큼 그를 지치게 하고 싶어지는 거야.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서 요구받았다는 마음들의 곱절의 곱절을 더 내어 달라고 투쟁하고 싶어졌어. 그러고 나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가 나를 밀쳐내는 상상을 했어. 저 아래로 떨어지는 나를 그 두 눈으로 확인시키는 거야. 사랑을 줄 수 없는 무관심이, 정확하게 사랑할 줄 모르는 무능력이 그 상대를 얼마만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그가 확인했으면 좋겠다는 악한 마음에 시달렸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에 대해 들어봤어? 내가 아주 어릴 적 부터 우리 집 서재에 꽂혀 있던 책이였는데, 책을 펼치면 내가 너무 어려서 이해할 수 없었던 글자들이였지만, 제목만은 내게 선명하게 남아 있어. '남자는 화성에서 오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고? 남자는 여자랑 그만큼 다른 존재일까..' 그 때 나는 지금 나를 전혀 모르겠지. 지금 나는 우리 두 사람이 다른 행성에서 왔을지도 모르겠다고 믿어. 

하지 않아도 될 마음까지 설명하는 나와, 충분히 해야할 말들을 자가소화시키고 태연해지는 그는 필요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이야.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렇듯이.


어쨌거나 나는 집에 들어왔고, 그는 이쯤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할지 몰라. 그는 한동안 친구들과 맥주를 좀 덜 마시거나 좀 덜 친하게 지내는 척이라도 한다면 내가 곧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할지 몰라. 

나는 더 모르겠어. 왜 ‘그’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어. 그와 함께한 시간들이 내 몸 깊숙이서 천천히 어떤 형태로, 마치 세포처럼 축적 되었는데 그것을 한꺼번에 몰살시키려는 것을 나는 아직 해내지 못해서일까. 

나란 인간이 내가 아닌 다른 한 인간에게 가진 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 아직까지 살아있는 감정에 대해 남아있는 호기심 때문일까. 


누군가를 정확하게 사랑하는 일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그가 그것에 실패했다고 말할 때, 나는 그를 정확하게 사랑해줬나. 

언니, 나도 그것에 실패했어. 철저하게 실패했어.

(나의 실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테지만, 설사 그에게 내 실패에 대해 말할 기회를 준다해도 그가 그것을 잘 꼬집어내어 말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는 말하는 쪽보다 말하지 않는 쪽이 더 편한 사람이라서, 좀 덜 불편하기 위하여 최대한 말을 아낄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말을 해야하고 그것을 달궈내야하고,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납득할만한 끝을 봐야하는 몹쓸 성격의 나보다는, 나에 의해서 좀 더 많이 해석될 그가 나쁜 사람이 되는거야.)

그보다 내가 더 실패했다고 말해도, 인정해. 아무래도 '경험'의 차이라는 변명을 덧붙이면서. 

나는 누군가를 처음으로 이렇게까지 좋아해봤고, 누군가와 처음으로 이렇게까지 살아봤어. 처음이라고.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을 표현할 때, 그것이 그 상대에게는 너무 크고 많은 감정이라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걸 몰랐어. 그 사람이 내게 줄 사랑의 자리도 남겨놔야한다는 걸 몰랐어. 정말로. (이제 그걸 알았다고 해서 앞으로 내가 그 남겨놓음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도 않아. 그건 내게 너무 어려워. 어쩌면 나는 영영 너무 과잉된 사람인 채 누군가를 만날테고, 운이 좋아야지만 남겨놓음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마주할 수 있을거야.)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사랑한다고 믿을 때,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이 꼭 같은 곳을 쳐다볼거란 걸 암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내가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일축해버리고, 여기서 그가 어울리길 좋아하는 친구들을 나는 전혀 좋아하지 않거든. 작고 소소한 차이들에 서로 관용적일 수 없을 때 서로를 작고 소소하게 무시하기 시작하고, 마음의 틈은 더해지는 무시와 무관심으로 좀 더 벌어지고, 나중엔 실체인 몸이 함께해도 마음은 실재하지 않는 관계가 되는거야.    


Leanne이랑 Todd 기억나지? 내가 새로 이사간 집의 호스트들. 'Unicornsdoexist.'

섹스광 토드와 그를 사랑하는 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Dennis한테도 해줬거든.(Dennis는 내가 일하는 카페의 사장 아들인데, 요즘 얘랑 같이 일하는 날들이 많아졌어. ) Dennis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이 몇 있나봐. 서로 연인관계이지만 성적으로 오픈된.  

Dennis 자신은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자신의 소유욕과 질투심을 극복할 수가 없을거래. 생물학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사회적, 심리적으로는 공감이 안된다고, 어쩌면 자기가 너무 사회화된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걔가 'gratitude'에 대한 말을 꺼냈어. '자기가 가진 관계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안다면 누군가와 오래도록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관계는 그런 관계야. 5살 때 처음 만나서 아주 어릴 적부터 연인이였는데 백발의 노인이 될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관계.'  

나는 Dennis의 말에 흥분했어. 토드와 리안의 관계, 그녀가 말해준 수많은 자유로운 관계들은 분명 내게 새롭게 들렸어. 저런 식으로도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구나. 그렇지만 내가 꿈꾸는 관계도 결국 Dennis가 말한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하고 지켜주는 관계란 걸 알거든. 세상에는 가치있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만, 그 중에서 특히 몇 개의 가치는 내게 절대적인거야. 그리고 나는 그 절대성을 절대로 잊지 않는거야. 그것은 너무 절대적으로 가치있어서 빛이 나서 소중해서, 그것이 꺼지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사랑하는 일이야. 그 일을 하는 데에 남은 생을 사는 거야. 그 사람이 내게 얼마나 감사한 사람인지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까먹지 말고,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사랑하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도 그덕분에 그나마 살아갈 힘만은 계속 낼 수 있는거야.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내 옆에 있으니까, 다른 무엇들이 날 조금 힘들게 해도 그건 그렇게까지 중요해질 수 없는거야. 

이런 일은 우리가 서로 '정확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가능할 일인거야.


혼자서 캔맥을 마시면서 영화 '비포 선셋'을 다시 봤어. 에단 호크랑 줄리 델피는 그 강렬한 첫만남 이후,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서로 어떠한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은 채 헤어져. We were both afraid of fading out. 두 사람 모두,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일상을 나누게 되었을 때, 여행에서의 그 강렬하고 뜨거웠던 감정이 시간이 가며 서서히 사그라들거나 희미해질 것이 겁났기 때문이야. 

시간이 가면서 희미해질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 많아. 그 사이 전혀 다른 성질로 변해버릴지도 모르고. 사랑이 희미해진 사랑으로 끝나버리는 게, 사랑이 사랑 아닌 것으로 변해버리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시간이 가지면 조금씩 너무나 쉽게 조금씩 희미해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노력을 해나가는 일,  내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이 내 곁에 있을 때 그것의 가치를 죽이지 않는 일, 그것을 가장 빛나게 바라봐주는 일, 내가 원하는 일인데, 지금 내가 잘 하지 못하는 일이야.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 그와 함께하고 싶어. 집을 나가고, 다시 집에 돌아오고, 여전히 그를 잘 이해할 수 없고, 여전히 내가 그와 잘 지낼 수 있을거라고 다짐할 수가 없는데도, 나는 그와 함께하고 싶어. 

내가 발견한 그 애의 어떤 예쁜 마음들을, 다른 이들은 몰라주겠지만 나는 느낄 수 있는 그것들을, 옆에서 오래도록 들어주며 그 애 옆에 앉아있고 싶어. 그의 냄새를 앞으로도 더 맡고 싶어. 내가 좀 더 강한 사람이라서 그가 힘들 때 내가 내 어깨를 내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가 내 옆에서 잘 쉬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있잖아 언니, 여전히 그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아무래도 말이 안되나? 

사랑은 내 자의로만 가능한 게 아니니까.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어떤 식으로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조급했던 마음은 더 이상 가지지 않을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때 우리가 그랬었지하며 그렇게 또 몇 년을 함께하고 또 몇 년을 함께하면서 함께 나이가 들 수도 있을거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포기와 어떤 결심으로 우리 두 사람은 결별할 수도 있겠지. 끝이 어떻게 되더라도 그건 내 관할이 아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곰곰이 생각하고 천천히 해나가기로 했어. 


내 고민상담을 똑같이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편지로 썼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거야. 

'너는 네가 뭘 해야할지 알고 있잖아. 지금부터라도 그를 '정확히 사랑해줘'. 네가 먼저 그렇게 해봐.' 



언니는 내 편지에 뭐라고 답을 줄거야?

이제 다시는 30분 거리의 자전거 통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가끔씩 그 자전거길은 찾을 것 같아. 운전은 아직도 배우고 있는데 정말 나혼자서 운전을 하려면 1년은 더 걸릴 것 같거든. 혼자서 너무 외로우면 그 자전거길로 자전거를 타러 가려고. 아, 그것도 여름에만 가능하겠다. 언니 운전상태는 어떤가?


이제 다시 내 kitchen을 되찾게 되었는데, 정말 옆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더니, 요리하는 즐거움도 어쩌면 특권같아. 우리 엄마는 평생을 즐거워서 하는 요리가 아니라 남편 자식 밥먹여야해서 하는 요리를 했는데, 나는 내 혀와 살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잖아. 과도한 특권이야. 

곧 김치를 다시 만들고, 바나나브레드도 굽고, hummus도 만들려고. 최근에 vegan scramble egg를 만들었는데, 망하진 않았어도 맛있지도 않더라고. 근데 조금만 더 레시피를 수정하면.. 뭔가 나올 것 같은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언니는 내가 한 음식들을 좀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좋아하는 것까지가 좀 어렵다면, 먹어주긴 할 것 같다.


다음 주에도 writing 모임에 참석하려고.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주는 인상이 굉장히 좋아. 말을 하면서 머뭇거리는 것도 좋고, 조심스러운 질문들이 생겨나는 것도 좋고, 과도하게 리액션하지 않는 건조함도 좋고. 무엇보다 이 모임에서 내가 자연스러운 사람일 수 있다는 게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건 자신이 없고, 내가 했던 내가 깨달은 나의 못난 짓들을 하지 않는 것에 무진장 노력할거야. 노력하다보면 나아질 수도 있을거야. 

나아지지 않으면, 그것이 내 노력만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땐, 또 살아가겠지. 


굳이 답은 안 주셔도 됩니다. 대신,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안부나 전해줘요. 할머니는 어떠신지도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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