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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Dec 27. 2018

[편지] <오하우,Ohau>을 다녀와서

H에게


1. Ohau, Hawaii


Vera는 역사도 없는 물 뿐인 곳, 전혀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며 하와이를 없신 여겼지만, 하와이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찾고 싶은 마음 뿐이게 된다. 내게 오하우(Ohau)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게 아름다운 곳이였어. 

물과 태양이 그리웠어. 일주일 동안 사방이 바다인 곳에서 발가벗고 놀던 나는 피부 껍질이 벗겨지는 화상을 품고 돌아왔어.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네. 어딘들 조금 더 벗겨진다해도 뭐가 문제랴. 탁 트인 바다와, 그 바다 너머에서부터 달려오는 파도와, 파도를 대신하여 먼저 달려와주는 바람과, 텔레토비의 아기 햇님같이 언제나 웃고만 있을 것 같은 태양만 있어준다면야. 저쪽 바다를 건너면 한국이 있고 반대편 바다를 건너면 또 캐나다인데, 나는 내 정체성을 생전 처음인 하와이에서 찾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다 왔어. 아무래도 내가 하와이 사람이였어야지 공평하다는, 정체모를 억지가 생기는 거야. 

캘거리의 겨울이 내 하와이 찬양의 주범일거야. 여긴 언니, 너무 춥고 너무 산이다.


여행의 시작은 순조롭지 않았어. 렌트카를 빌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핸드폰 로밍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어. 호놀룰루 공항에서 예약해둔 숙소까지 렌트카 회사에서 골라잡은 와이키키 시티 지도에 의지해야 했지. 영학이는 운전을, 나는 길안내를 맡았어. 와이키키 시티에서는 처음 운전하는 영학이와, 물론 처음 교통 안내를 경험하는 나는 우리의 도요타와 함께 같은 길목만 10 바퀴를 넘게 돌았어. 비행기에서 밥을 얻어먹지 못한 우리 두 사람은 심각한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리던 중이였지. 그것도 경험이지,라고 말해선 안될 순간들이였어. 우리 둘다 폭발 일보 직전에서, 이미 나는 영학이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으니까. 

10바퀴째를 돌고 나서, 나는 더는 못 돌겠다고 선언했어. 우리는 맥주부터 마시기로 했지. 와이키키 해변 바로 앞으로 상점들이 줄 서 있는데, 걷는 중에 눈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앉았어. 나는 앉자마자 맥주를 시켰고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어. 맥주가 그렇게까지 맛있고 시원한 것인 줄 몰랐어. 그 맥주 덕분에, 되찾은 의식으로 숙소도 찾을 수 있었고, 여행의 시작을 다시금 축하할 마음도 생겼었지.  


숙소는, 처참한 정도는 아니였다고 말할게. 오하우를 여러 번 다녀온 적 있는 친구는 무슨 무슨 호텔이 괜찮다고 추천해줬는데, 나는 도저히 그 많은 tax를 감당하면서 호텔에 머물 형편이 안되잖아. 우리가 머물었던 호스텔은 내가 검색한 것 중에서는 가장 싸면서 괜찮은 평점을 유지하던 곳이였는데, 투숙자 대부분이 내 또래의 젋은 배낭 여행객들이였어. 그래서 좋았어. 오랜만에 느끼는 여행자들의 설렘과 흥분이 거기 있었거든. 

호스텔에서는 아침마다 커피와 토스트를 아침 식사로 제공했는데, 홀로 테이블 주변을 얼쩡 거릴 때마다 꼭 말거는 애들이 있더라고. '하와이는 미국에서 가장 인종 차별이 적은 곳이라서, 또 자연환경도 예쁘고. 이런 데서 일하면 좋겠다 싶어서 일자리 찾으러 왔어.' 멕시코 시티에서 살고 있는, 재생 에너지 공부를 하는 알렉산드로(였나)는 모두들 놀러오는 하와이에 일자리를 구하러 왔대. 자기가 만든 태양광 에너지판도 인스타그램에 공유한다면서, 그것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는데 죄다 숫자얘기라 이해하기가 어렵더라. 어쨌든 얘 말로는 재생 에너지 사용이 시급한만큼 발전 속도도 더욱더 빨라지는 중이래. 그래서 내가, '그래? 근데 왜 주변을 돌아보면 재생 에너지는 아직도 너무 생경해. 내가 사는 캘거리만 해도 파이프라인을 두고 주정부와 시민들 사이에 대립 각이 여전해. 잘은 모르지만 한국도 캐나다도 아직까지는 화석연료에 의존성이 너무 큰 것 같아.'라니까, 그 친구 말로는 북유럽은 다르대. 우리는 종이컵에 담긴 오트를 플라스틱 커피 스틱으로 퍼먹으면서 한동안 환경 얘기를, 핫요가의 좋은 점, 멕시코 시티가 실제로 얼마만큼 위험한 곳인가 등등에 대해 잡담했어. 

어떤 애는 하와이에서 위드를 구하는 게 쉬울 것 같냐고 내게 물어오더라. '그러지 않을까? 근데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는 몰라, 쏘리.' 자기는 오늘 와이키키에서 서핑을 할 참이고, 내일은 North Shore로 갈 예정이라면서 와이키키 파도가 어떠냐고 또 물어. 내가 파도에 대해서 뭘 알겠어. 응, 파도가 참 부드러웠어, 라고 말할 뿐.


실제로 와이키키 해변의 파도는 부드러워 언니. 모래 사장에 앉아서 쳐다만 보고 있으면 파도가 파도네, 하고 말거야. 서핑보드에 올라서 한 두번쯤 파도를 타다보면 신이 막 나거든. '일어섰다!' 살짝 굽힌 두 무릎에 Mickey(서핑 강사) 말대로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칼날 모양을 한 두 손으로 요리조리 균형을 잡고 있자니 이대로 계속 파도가 나를 쳐줬으면 좋겠는 거야. 좀 더 거칠게 쳐달라고, 파도한테 부탁하고 싶어져. 

오만해진 나는  Mickey에게 North Shore에서 서핑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지. '아, 너희는 거기서 못 타. Wave in there is so fierce.' Mickey는 콧방구를 꼈지.

나중에 Sandy beach를 거쳐 North shore의 Sunset beach를 다녀온 후에야 fierce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어. 거기서 서핑을 타다가는 서핑보드나 나나 둘 다 부서지겠더라고. 

해변마다 파도 성격이 다 달라. 나는 유순하고 다정한 와이키키가 좋아. 


Mickey에게서 2시간 서핑 강습을 받은 이후에, 나는 영학이한테 아무래도 한 번 더 수업을 받아야할 것 같다고 말했어. 영학이는 우리 스스로 타봐야한다고 했지. 

그 날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어. 우리는 파도를 잡을 줄 모르니까. 사실 서핑의 8할은 paddling인데, 해변가로 떠내려간 이후로 다시 파도 포인트로 되돌아오는 걸 3번만 해도 체력이 고갈되더라고. 거기다 계속 파도를 잡지 못하니까 기운도 빠지고. 파도를 보는 게 서핑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능력이던지. 매번 고꾸라지는 나를 불쌍히 여기던 서퍼 강사들이 옆에서 coming! coming! coming! 하고 파도를 봐주니까 또 보드에 올라탈 수 있겠는거야.  근데 아무도 그 커밍을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언제 패들링을 해야하는지 감도 잠을 수가 없었어. 

저 멀리를 바라보는 거야. 울렁거리면서 다가오는 것을. 그리고 그게 내 보드를 가장 잘 건드릴 지점을 찾아 패들링을 해. 앞을 향해 손을 내젓고, 동시에 뒤를 돌아보며 내게 다가오는 파도의 몸체를 확인해. 이 때다,하면 침착하게 일어서는 거야. 발 밑에서 파도가 나를 치고 나는 바람을 가르며 앞을 향해 가. 그 기분은.



물은 육지와는 다른 시간을 가진 것 같아. 물 속에 있으면 시간이 증발되는 느낌이 들어. 

내겐 물과 태양만큼이나, 시간이 사라지는 마술도 필요했어. 일곱 시 반 출근 두 시 퇴근 네시 반 운동 여섯 시 저녁 쉐도잉 두 시간 6분 러닝 잉글리쉬 12시 전에는 자야지. 4일의 슬럼프과 25일의 무던함의 일상. 반복의 한 달 두 달 또 다른 1월 1일 또 다른 나이. 일곱 시 반 출근 세 시 퇴근 시간의 효율성 나의 생산성 2050년의 나는 누구일까 지구는 무엇일까. 육지에 사는 나는 시간의 수용자야. 가끔씩은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먹는 나쁜 짓을 해서 이렇게 살게 되었다고 누구라도 탓하고 싶어져. 

다른 사람을 탓하는 건 쿨하지 못하니까, 대신 재밌는 놀이를 해야한다는 충동에 휩싸여. 몸 속에 시간이 너무 많이 쌓여서 어깨까지 아파오기 시작할 즈음에. 그럼 그 때는 정말 시간을 증발시키러 나서야 할 때지. 혹은 시간을 증발시켰다고 믿을 수 있는 어떤 곳에 가닿기라도 하는거야.


베트남 다낭, 일본 오키나와. 다음 여행지들을 미리 알아보는 중이야. 언제가 될지는 미정이지만, 한달쯤 서핑을 배우면 turn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오하우에 있는 동안 낮에는 서핑을, 아침 일찍 트레킹을, 해가 질 즈음엔 선셋 포인트를 찾아갔어. 계획을 했던 건 아니야. 대부분의 트레킹 장소는 오후 4시쯤 되면 진입이 불가해지고, 이른 아침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좋은 경치를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아침 7시면 차에 올라탔어. 

Ohau에는 Diamond head라는 곳과 Koko head라는 두가지 Crater가 있는데 예전에는 미국에서 군사 목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아(그나마 섬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이라서). 다이아몬드 헤드는 좀 더 관광 명소 같고, 코코 헤드는 그 지역 주민들의 운동 명소 같더라고. 지역민들이 관광객보다 훨씬 많더라. 이런 경치가 일상인 곳에서 운동하면 저절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까 싶어. 달리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Manoa fall 트레킹은 땅이 질었고 우거진 숲을 헤쳐나가는 느낌을 줬어. 예전에는 주변 식물군이 다양했었는데 미국에서 가축들을 데리고 와서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유일무이한 식물군들이 많이 사라졌대. 호주나 뉴질랜드를 발견한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도 처음으로 발견했나봐. 제임스 쿡이 하와이를 발견했을 때까지만 해도 본토 주민들의 삶의 질서는 유지된 듯 한데, 미국이 하와이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로는 원주민들의 삶도 큰 변화를 겪은 것 같았어.     

Makapu'u lighthouse 트레킹은, 언제나 등대가 있는 곳은 그렇듯 운치가 좋은 곳이였어. 시야가 밝은 날에는 고래를 볼 수 있는 포인트도 있었는데 우리는 못 봤지. 고래를 못 봐도 좋았어. 두 눈이 바다로만 채워질 수 있는 시간들도 흔치 않으니까. 호주를 여행하는 동안 너무나 많은 뷰포인트에서 광대한 바다들을 바라봤기 때문에, 한동안 바다를 쳐다보는 일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어. 근데 오하우에서 바라보는 바다들에 다시 마음이 울렁이더라. 오래도록 바다를 보지 못했기 때문일거야. 겹겹이 건물들이 가림막이 되어 내 시야를 좁혀오는 일상 환경에서 벗어나 자연의 바다를 어떤 장애물도 없이 멀리까지 내다보는 자유를, 눈이 경험하고 마음이 놀랐던 거야.     


나머지 3일은 백팩커가 아닌 하와이 가정집에서 머물렀어. Baron(집주인)은 좋은 호스트였어. 항공사 일을 은퇴한 뒤, 노후를 생각하면서 시작한 숙박업이래. 백팩커에 비하면 왕궁처럼 좋더라. 방은 널쩍하고 깨끗했고, 거실 쇼파는 푹신하다 못해 포근했고, 키친을 우리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도 있었어. 

'아, 이번 숙소는 제발 좋았으면 좋겠다.' 영학이가 기대했는데 잘된 일이였지. 나보다 이런 부분은 훨씬 더 까다로워. 백팩커에서도 단체룸은 질색해. 나는 사실 길바닥에서 천막을 치고 자도 붙잡혀가지만 않는다면(하와이는 따뜻하잖아), 충분히 그럴 의향이 있거든. 어쨌든 우리 둘 다 그곳에 너무 편히 있다왔어.   


China wall도 Baron이 알려줘서 갈 수 있었어. China wall에서 본 선셋은 잊을 수가 없어. 해가 지는 와중에 저 멀리서 카누를 타는 누군가가 해를 가로질러 가는 거야. 파도가 센 편이였는데도 카누는 정말 빠르더라고. 붉은 해는 바다로 가라앉는데 어디서 나타난지 모를 카누 한 척이 해를 가로질러 반대편 어딘가로 쉼없이 향해가는 장면은 압도적이였어. 

남자애들은 낚시를 하고 햇빛에 건강하게 탄 여자 애는 그 옆에서 다이빙을 해. 바다 한 편에서는 창살을 쥐고 고기를 잡는 한 무리가 보이고 그 맞은 편 돌 위에서는 여행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 한동안 그 모든 풍경들을 넋놓고 바라봤어.


 우리가 가보고 싶었던 곳들이 Baron 집에서 가까이 있어 좋았어. Hanauma bay도 그 중 하나였어. 여기서 스노쿨링을 꼭 해보고 싶었거든. 입장료도 있었고 만으로 향하기 전에 10분 정도 비디오를 시청하고 교육도 받고 들어갔던 곳이야. 사실 오하우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핑을 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어. 와이키키 비치는 마치 대명사인 듯 유명해서 한 때 한국에서는 '신혼 여행=하와이' 등식이 성립할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관광객도 많아서 환경 오염이 이미 많이 진행됐겠다 생각했지. 

비치를 돌아다니고 트레킹을 하면서 놀랬던 것은 오하우의 자연은 정말 잘 보존되어 있다는 거야. 미국인데 말이야(이건 내 고정관념)! 순전히 내 추측인데, 하와이에 일본인들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어. (이것도 내 고정관념) 일본인들이 뭐든지 깨끗하고 정갈하게 관리를 잘 하잖아. 하와이는 미국 땅이지만, 실제로 하와이는 일본이라고 해도 억지가 없을 만큼 우린 일본인들을 많이 봤어. 우리가 간 식당은 대부분 오너가 일본 사람이였고, 놀러오는 관광객 중의 태반도 일본 사람들, 충격적이였던 건 백팩커 주변에서 우연히 발견한 자그마한 비건 식당에서는 영어로 질문을 하는데 의사소통이 힘들었어.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일본인들이였는데 거기서 가장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나보다도 영어를 못하더라고. 

실제로 하와이의 인구 구성을 보면 필리핀, 일본 사람들이 두드러지게 많대. 미국에서 백인이 가장 적은 주, 소수가 다수가 되는 주가 하와이야. 내가 하와이를 간다니까 여기서 만난 필리핀 친구가 너무 좋겠다면서 말하길, 'I feel like I'm not a minority anymore in there!'.

               

어, 그래서 스노쿨링은 재밌었어. 영학이가 장비에 자꾸 물이 들어온다면서 엄살을 떨길래 기꺼이 내 것이랑 바꿔줬지. 내가 영학이보다 스노쿨링용 수영은 더 잘하더라. 무슨 말이냐면 Hanauma bay 특성상 암초가 굉장히 많은데 그 암초 표면에 식생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발로 밟거나 건드리면 안된다고 비디오가 교육시키더라고. 근데 암초가 물 표면에 닿을 만큼 커서 그 위를 수영하기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였어. 암초 사이사이에 고기들이 많았는데, 그럼 고기들 구경하러 그 암초 위를 수영하고 다녀할 거 아니야. 암초에 몸을 대이지 않는 게 묘기인 마냥 조심 조심 숨을 쉬며 발차기를 했지. 그러나 내가 고프로를 잡고 수영이 가능한 정도는 못되어 이상한 사진들만 죄다 찍었어. 가령 내 뱃살같은.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 대에 가서 시야가 깨끗하지 않았던 게 아쉽긴 하다. 


오바마가 호놀룰루 출생인 거 알고 있었어? 나는 몰랐어. 오바마가 제일 좋아하는 비치가 샌디 비치였다고 어느 안내 책자에서 읽고 알았지. 오바마가 바디 서핑을 좋아했대. 바디 서핑은 보드를 타는 일반 서핑이랑 다르게 배와 가슴으로만 파도를 타는 맨몸 서핑이야. 그래서 우리도 도전해봤지. 

영학이는 샌디 비치에서 모자랑 선글라스를 잃어버렸어. 파도가 삼켜버렸거든. 멀리서 보고서 그냥 파도구나 하고 신나게 뛰어들던 영학이는 곧바로 파도에 먹히더라. 터덜터덜 배를 움켜잡고 돌아나와. 이런 파도는 처음이라고, 명치를 치였대. 

저렇게 엄살이 심해서야 되겠나. 어디 한번, 내가 뛰어들어가봤지. 오마이갓, 비키니를 입었는데 언니, 파도가 내 비키니를 벗길 정도야. 탑은 목에 걸쳐졌고 팬티는 무릅까지 벗겨졌어. 물이 빠지기 전에 얼른 더 깊숙이 물 속으로 들어가서 재정비를 하는데, 또 한번 파도가 치는거야. 물을 엄청 마셨어. 그러나 정신을 부여잡고 먼저 탑을 훅 내린 뒤 모래를 가득 담은 팬티를 주워 입었어. 저 멀리서 또 파도가 오는 게 보였어. 한 번 더 파도를 들이받다간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어. 서둘러 모래를 걷어내면서 빨리 빨리 도망쳤지. 나는 그 날 하루 종일, 아니 캐나다에 돌아온 이후 일주일은 더 머리에 눌러붙은 모래와 싸워야 했어. 그 이후로 재빨리 샤워를 했어야 했는데, north shore에 가는 길목이였기 때문에 모든 모래를 깨끗이 털어내지 못했던 게 잘못이였지. 

샌디 비치의 모래는 파도만큼 끈덕진 모래였어. 이름 값을 톡톡히 해.

근데 그곳 사람들은 바디 서핑을 잘도 하더라고. 큰 파도가 마주오면 잠수 하듯 물 밑으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파도를 넘고, 파도를 탈 때는 가볍게 몸을 파도 위로 날려 타는데, 파도에 따라 몸을 이리저리 돌리기도 했어. 한 바퀴를 회전하는 사람도 봤어. 대부분 바디 서핑을 자주 해본 로컬처럼 보였어. 영학이도 몇 번 더 시도해보더니 나중엔 몇 번 파도를 타넘긴 하더라. 나는 이미 쇼크를 받아서 다시 들어갈 엄두를 못냈지만. 다음에는 원피스형 수영복을 입고 가야겠어. 


North shore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워. 그 날 North shore에서 서핑 대회가 있었거든. 해가 질무렵에야 Sunset beach에(노스 쇼어에 있는 비치들 중 하나) 도착했어. 늦게까지 보드를 타는 서퍼들을 있었어. 파도가 크면 파이프 모양의 긴 공허를 만들잖아. 그걸 Pipeline 이라고 하는데 그 날 우리는 전문 서퍼들이 파이프라인을 통과하는 것을 눈 앞에서 봤지. 순간 전율을 느꼈어. 저 물살을 건드리는 손끝의 느낌은 어떨까. 

해가 지는 와중에 저 바다 멀리서 파도를 타는 서퍼들을 보면서 영학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대. '사람은 정말 작구나. 이 큰 바다에, 더 클 바다에 비하면 우리는 저렇게 점이구나. 점도 아닐지도 몰라. 하여간 인간은 너무나 너무나 작은 존재야.'같은.


여행을 가면 인간은 너무나 너무나 작은 존재라서 하찮은 것에 웃음을 주고 걱정없이 맥주를 퍼 마실 수 있는데, 돈을 벌어먹고 사는 곳으로 돌아오면 나란 인간이 너무나 거대한 존재가 되어버려.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 무엇하나라도 꽉 부여잡고 싶어. 도대체 무엇을.



2. 다시 일상


오하우 여행 이후로 일상이 정비되지 않은 채 지내는 중이야. 며칠동안 아팠어. 감기몸살이였던 것 같아. 언니한테 편지를 쓰겠다 말한 날에 슬슬 어지럽게 시작하더니 다음날 저녁에 몸져 누웠어. 아파도 약은 먹지 않겠다는 내 고집이 무너졌지. 기침이 심해서 잠에 들 수가 없었어. 영학이가 감기약이라고 준 걸 먹었어. 그리고 나았어.  근데 그 약이 사실은 치통약이였더라고. 감기에 걸렸을 때 치통약을 먹으면 몇가지 부작용이 생기나봐.   

일하러 가고 싶지 않아. 일을 가면 또 일을 하는데 말이야, 애정이 식었다고 해야 할까. 이번 연휴를 거치고 나면 다시 주 6일 40시간 스케줄을 고수해야겠지. 그걸 생각하면 잘 쉬던 숨이 턱,하고 어디 걸렸다가 돌아와. 다음 휴가 계획을 좀 더 세세하게 새워야할까. 그럼 이 부작용이 조금이라도 경감될까?

영학이랑 떨어져 지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헤어지겠다는 게 아니라, 한동안 집을 따로 구해 나 혼자 살아볼까 생각하고 있어. 내가 생각해도 비정상적이라 생각될만큼 그에 대한 짜증이 늘었어. 여전히 그를 좋아하는데, 내가 왜 이럴까. 그를 함부러 대하는 내가 싫은데, 또다시 그에게 함부러 말하는 나를 발견해. 


이게 다 오하우 때문이야. 여기서 나는 더 이상 신나지 않아. 너무 무거울 뿐이야.


언니는 어떻게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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