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논리보다 호감
어렸을 때, 전라도에 사시는 고모 두 분은 이렇게 대화하셨다.
'긍께 이번에는 거시기한 상황인께 거시기 해불자고~' 듣고 있던 다른 고모는
'그럼 그라까? 그라믄 이번에는 어차피 거시기 헝께 그래부까? 알았어. 이번에는 거시기 해불자고~'
두 분의 대화에는 주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주 깔끔하게 소통하셨고, 10살의 내가 듣고 보기엔 꽤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 내용이었다.
그렇다. 잘 소통되고 대화 잘 통하는 사이에는 그저 일반적으로, 상식적 해석으로만은 어려운, 공감의 오묘한 교감이 있다.
논리적이고 유려한 말솜씨, 다양한 어휘력, 많은 지식이 주는 장점이 분명 있지만, 내 의견을 잘 전하는 말 잘하는 것과 서로 대화 잘 통하능 것은 다르다.
말을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하고, 말을 잘 할수 있을까? 가 아닌, 서로의 말을 잘 들으려 하고 궁금해한다. 궁금해하고 들으려 하며 품으려 하니, 자칫 단어가 좀 다르거나 틀려도 이해하고 알아듣는다.
진짜 친한 사람, 잘 통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들어보면 똑똑하고 논리 정연한 말만 오가는 경우는 드물다. 말이라는 표현의 수단에 연연하기 이전에 상대라는 사람을 보고, 그의 말을 존중한다.
대화의 본질은 말이라는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의 시선에 있다.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해도 기저귀를 갈 때가 됐는지, 우유를 줘야 하는지, 안아줘야 하는지, 잠 오는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초능력처럼 알아차린다. 가끔 엄마의 예측과 다를 때도 있겠지만 그럴때도 상황에 맞게 또 유연하게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를 대한다. 엄마가 아이이게 뭔가를 바라고 말하려 하기보단, 아이라는 상대에게 관심 가지고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기에, 말 너머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자주 쓰는 말로 '경청'이라 하는데, 경청은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참 뻔한 말이다. 상대의 말을 잘 듣는다... 침 많이도 들었던 말, 누군가 에겐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너무 익숙한 클리셰다.
그러나 실제로 행하는 게 어렵다는 게 함정이다. 상대의 말을 존중하고 잘 든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어떻게 하면 잘 전할 수 있을까에 관심과 에너지를 더 쓰며 산다.
어떻게 하면 잘 들을 수 있을까?
우선, 대화에 대한 '개념 전환'이 필요하다. 말이라는 출력은 결국 입력이 잘 돼야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깨닫자. 자신이 판매하려는 제품에 대해 제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알고 있더라도, 고객이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의 말을 차분히 진심으로 들어보고 말하지 않으면 혼자서만 똑똑한 초점이 맞지 않은 말들을 할 확률이 높다. 친구에게 해주고 싶은 아무리 좋은 말이 있더라도 지금 그 친구의 마음상태와 나누고 싶은 대화의 종류가 내 생각과 다르다면 내 말은 친구에게 좋은 말이 되기 어렵다.
가짜로 듣는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 해주고 싶은 말에만 연연했을 때보다 더욱 자연스레 교감하고 공감되는 말로 이어진다.
대화는 논리보다 호감이이다.
가르치려 하거나, 우위에 서려하거나, 반대대되는 의견,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 보다는 '나'라는 자아를 증명하려 하고 때론 내 자존심을 세우려 하기에 나오는 표현들이다.
그 만남의 목적이 학습과 배움에 목적을 둔 수업이나 강의가 아닌 이상, 사람은 가르치거나 이길 대상이 아니라 어울릴 대상이다.
왜 굳이 똑똑한 척해야 하고, 이겨야 하는가? 그렇게 하면 그 만남 후 돌아오는 길이 과연 후련하고 만족스러울까? 때론 내 마음의 공간과 여백을 너에게 넉넉히 양보하고, 관심가지며 듣는 귀를 진심으로 열었을 때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환기되고 순환된다. 그 속에 상쾌함이 있고 개운함이 있으며 그런 사람 그런 만남에서 호감이란 느낌을 가진다. 결국 그것이 나에게도 이득이다.
'그래, 맞아.. 대화 잘하는 건 말 잘하는 것과는 다르구나.'
그 한 줄의 이 우리의 대화를 도울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