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성과 떠나는 이탈리아 아트 트립: 일생에 한 번은 중세 미술 여행
사회는 세 계급으로 구분된다.
싸우는 자들,
기도하는 자들,
그리고 일하는 자들.
11세기 프랑스 라옹Laon 지역의 주교이자 시인인 아달베론Adalbéron의 말입니다. 이 말은 그가 중세 초기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싸우는 자들은 기사이고, 기도하는 자들은 사제, 일하는 자들은 농부와 수공업자들을 일컫습니다. 변화를 원치 않는 지배계급의 사고를 보여주는 말이자 중세 초기 수백 년 동안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세는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11세기에는 이미 ‘상업하는 자들’이라는 또 하나의 계층이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중세 전기가 시작되는 10세기 유럽의 경제성장의 원인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농업생산성의 증대입니다. 안정적인 식량 공급은 여유식량의 증대로 이어졌고 이는 중세 사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도시의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교역이 이뤄지면서 노동 인력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게 됩니다. 중세 발전의 근간이 되는 도시의 성장과 상업 발달의 초석이 다져진 것이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상업은 주로 양모 산업을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양모 상인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웠고
영주의 땅에 매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경제력을 갖게 된 상인들이 시민 세력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영주를 비롯한 귀족 세력들은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영주들은 상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장거리 교역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드는 등 상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민들이 귀족 세력의 전횡을 견제하고 성 밖의 도적 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 코뮌입니다. 코뮌은 중세의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코뮌의 등장은 견고하게 이어지던 사회 구조의 균열을 의미합니다. 중세 전기는 코뮌을 중심으로 뭉친 시민들과 권력을 등에 업은 귀족들 사이의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었습니다. 코뮌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처음 등장하였고 알프스를 넘어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각지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코뮌의 영향력은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12세기 말 무렵에는 기득권 세력을 위협할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코뮌의 독립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아달베론이 알고 있던 세계는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의 하위 계층이었던 시민들이 세력을 이뤄 정치적 권력 싸움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코뮌은 한순간의 봉기가 아니라 중세의 지형 자체가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코뮌의 등장은 견고했던 중세의 틈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근대라는 미지의 세계가 엿보인 최초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봉기의 장소가 이곳 코무네 광장입니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sopra Minerva(이하 미네르바 성당)입니다. 이곳에 그리스풍의 미네르바 성당이 없었다면 코무네 광장은 흔한 중세 도시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고대의 아름다움이 찬란하게 빛나는 그리스풍의 건축물은 도시에 깊이와 멋을 더해주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아시시의 유구한 역사를 상기시킵니다.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록》에서 아시시의 미네르바 성당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안내하는 아리따운 소년에게 미네르바 성당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이윽고 구시가지에 다다랐다. 보라! 눈앞에 칭송받아 마땅한 건물이 서 있었다. 완전한 구조를 갖춘, 고대 건물 중에서 처음 보는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너무나 겸손하게도 이런 작은 도시에 있지만, 다른 어느 도시에 있더라고 빛날 정도로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또한 그 벽면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독일의 대작가는 이 건축물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아시시라는 작은 도시에서 그리스 로마 양식의 전형이자 완벽한 예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행운이 아닙니다. 유럽 전역 어디에서도 이 정도로 잘 보존된 아름다운 고대 건축물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네르바 성당은 기원전 1세기경 지혜의 신인 미네르바 여신을 숭배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6세기에는 신전 문화가 쇠퇴하고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이곳을 성당으로 활용했고 코뮌에서는 법원으로 그리고 감옥으로도 활용했습니다. 1539년에 교황 바오로 3세가 이곳을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한 이후 지금까지 성당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라는 이름은 ‘미네르바 신전 위에 지어진 성모 마리아의 성당’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육중한 기둥을 어루만지며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예상 밖의 화려한 내부 장식에 놀라게 됩니다. 눈을 사로잡을 만큼 섬세하게 꾸며져 있지만 건물의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내부를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신전 본래의 강렬한 기에 눌려버리는 것 같습니다.
조토 역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벽화에서 미네르바 성당을 배경에 그린 바 있습니다. 천상의 세계나 성화 속 상상의 공간이 아닌 동시대 현실의 장소를 그림에 담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척 영리하고 지적인 방법으로 성스러운 인물이 탄생한 도시로서 아시시의 위상을 드러낸 것이자 그림 속 일화의 사실성을 높여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관람자들은 프란치스코의 삶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고 성인의 일화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네르바 사원 옆 시청 건물은 무척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 또한 사건의 사실성을 높여주는 데 기여합니다. 조토의 정확하고 과학적인 건축물 묘사는 이후 회화의 기본으로 확립됩니다.
1198년 가을, 코뮌의 구성원들은 미네르바 성당 앞에서 도시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사안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의견을 피력하는 시민 중에는 프란치스코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도 있었습니다. 긴 논쟁 끝에 코뮌은 신성로마제국의 집정관인 코라도 공작을 몰아내고 아시시를 자치도시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민들은 무기와 횃불을 들고 집정관이 거주하는 로카 마조레Rocca Maggiore 요새로 몰려갔습니다. 시민들의 분노에 놀란 코라도는 요새를 버리고 도망쳤고 시민들은 다시 군대가 요새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건물을 부수고 성곽을 허물어버렸습니다. 이때 도망친 귀족들이 아시시 근처 대도시인 페루자의 영주에게 원조를 구하면서 싸움은 아시시 대 페루자의 전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1202년, 아시시 시민군과 페루자 군대는 움브리아 평원 위에서 도시의 역사를 바꾸게 될 결전을 치룹니다.
기사가 되기를 꿈꾸던 열여섯 살의 프란치스코도 이 전투에 용감하게 참전하였습니다.
아시시와 페루자의 전투는 중세 전기의 정치 구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당시 유럽은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파와 교황을 지지하는 겔 파로 양분돼 있었습니다. 기벨린파는 교회가 속세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교회 타락의 원인이라며 속세는 왕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겔프파는 지상에 기독교 세계를 세우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속세를 다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세력의 싸움은 왕과 교황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세 시대에 왕은 기독교 사회의 수호자로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전제로 왕은 교회로부터 통치자의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이로써 교회는 안전을, 왕은 공동체의 신임을 얻게 되었지만 이러한 계약 관계는 늘 불안정했습니다. 왕은 교회의 막강한 권력이 언제나 불만이었으며 교회는 왕권이 너무 강해져서 교회가 정복당할까 봐 늘 불안해했습니다. 12세기에 이르러 대도시를 기반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들이 속속 나타나면서 두려움을 느낀 교황은 왕권을 견제하고 교회의 안전을 지키는 데 전력하게 됩니다.
특히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는 교황청이 있는 로마와 지금의 독일 지역인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위치했기 때문에 두 세력의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진 격전지였습니다. 밀라노 등 이탈리아 북부는 기벨린 파가 득세했고 나폴리와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중남부 지방은 겔프파가 강했습니다. 때문에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를 되찾아오기 위해 아시시를 비롯한 중부 지역의 코뮌을 배후에서 지원하며 군주들을 물리치도록 항쟁을 유도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은 아시시 시민군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습니다. 독립을 바랐던 시민들의 열망 또한 죽어가는 병사의 눈빛처럼 꺼졌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전쟁 포로가 되어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아버지가 막대한 포로 보상금을 낼 수 있을 만큼 부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에는 졌지만 프란치스코가 살아 돌아온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가 중세에 미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전쟁에 패한 것쯤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없는 중세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세 사람들에게 성 프란치스코는 ‘살아 있는 예수’와 같았으며 프란치스코 운동은 문명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때 프란치스코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면 아시시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마흔세 해 짧은 생애를 통해 도시와 시민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상업이 발달한 작은 도시였던 아시시는 가톨릭의 성지가 되었고 수도회를 중심으로 세속과는 다른 빛깔과 기운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의 삶과 꿈을 위협했던 억압과 폭력의 위협은 사라졌습니다. 긴 중세 동안 자유를 갈망해온 시민들의 피와 눈물은 신이 보내준 위대한 인간, 성 프란치스코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느새 로카 마조레Rocca maggiore 앞에 다다랐습니다. 탁 트인 하늘 아래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런 곳에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요새가 자아내는 이국적인 정취가 눈과 마음을 사로잡지만 주변의 풍광은 요새의 오라를 압도합니다. 로카 마조레는 처음부터 이곳에 세워지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기에 수백 년 동안 여기에 있었음에도 수바시오산과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견고한 요새도 돌무더기에 불과합니다. 요새 안으로 들어서면 무미건조하고 황량한 풍경을 보게 됩니다. 요새 안의 공간들은 너무 좁고 작아서 그 시절 코라도 공작의 위세나 권력의 무시무시함 같은 것도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텅 빈 곳간처럼 초라하고 황량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오히려 권력이란 것이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산책의 절정은 요새를 등지고 아시시 도심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움브리아 평원을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아시시의 산과 하늘, 대지에 세월이 깃든 회색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광경은 오직 아시시만의 환상적인 풍경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인간의 능력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은 인간의 손을 빌어 아시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시의 한 청년 프란치스코를 통해 중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저 멀리, 롬바르디아 평원 위에 우뚝 솟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 보입니다. 바로 저곳에서 중세를 뒤흔든 성 프란치스코의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를 태어나게 한
이탈리아의 국민 화가 조토를 만나다
일생에 한 번은 중세 미술 여행:『이틀리아 아트 트립』읽어보기 http://gilbut.co/c/20014741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