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성과 떠나는 이탈리아 아트 트립: 일생에 한 번은 중세 미술 여행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에 감탄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선은 이내 그 중심에 작은 건물인 포르치운쿨라Porziuncula로 향하게 됩니다. 성당 안에 다른 성당이 있는 모습은 낯설고 또 흥미롭습니다. 수백 년 전에 프란치스코가 직접돌을 나르고 흙을 발라 지은 성당입니다. 건물은 높이 4미터, 폭 7미터에 불과합니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단출한 모습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며 선교에 헌신한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닮았습니다.
이렇게 작고 허름한 교회에서 중세 유럽을 휩쓴 종교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프란치스코 운동과 관련해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작은형제회 수사들이 로마가톨릭 교단이 인정한 사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수도회에 입회한 사람들은 신분이나 재산과 관계없이 종교에 귀의하기로 한 일반 시민이었으며 이들은 교황의 허락하에 대중 설교와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역시 사제나 신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인 매력과 더불어 철저한 신앙적 삶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며 교황도 누리지 못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들 일반인 사제들의 활약을 빼고서 중세 역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1세기 이후 유럽은 급격한 계층 변동과 깊어지는 빈부격차로 사회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작은형제회는 가난한 서민의 편에서 부패한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신앙의 회복을 외치면서 성 베네딕도회처럼 보수화된 기존의 수도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수도회로 급부상합니다. 작은형제회의 활동은 높아지는 하층민의 불만을 완화하고 부를 재분배하는 사회적 갈등의 완충 역할을 하였습니다. 돈과 권력에 뼛속까지 물든 교단의 낡은 세력을 밀어내며 가톨릭 세계의 붕괴를 막고 재건을 이끌게 됩니다.
그만큼 성 프란치스코는 중세 사회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성 프란치스코는 신화로 전해지는 이적과 자연을 사랑한 자애로운 성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대에 그는 살아 있는 성인이었으며 사회 변혁을 이끄는 위대한 개혁가였습니다. 개혁의 동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함을 이야기합니다. 성직자의 부패를 비난하고 청빈을 강조하며 시민들을 선동하는 종파는 이미 여럿 있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그들과 달랐던 것은 철저한 신앙적 삶을 통해 보여준 진정성이었습니다.
작은형제회의 회칙은 무척 엄격했습니다. 수사들은 선교를 갈 때 화폐는 물론이고 신발, 심지어 성경책도 갖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누더기 같은 의복에 가죽 허리끈을 두르는 것도 금지되어서 노끈으로 허리를 묶고 다녔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작은형제회 수도복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사들에게 끊임없이 선교를 다니고 구호 활동을 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믿음은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에 있는 것이지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성서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믿음은 이론과 지식을 앞세우며 대중을 억압하고 이득을 취해온 사제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성직자들이 쓰는 라틴어가 아니라 이탈리아 지방 사투리로 설교했고 그로 인해 문자를 모르는 하층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습니다. 중세 시대에 서민들의 눈높이에서 설교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대중 사상가가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 대한 소문은 신화가 되어 유럽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 갑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프란치스코와 같은 신앙적 삶을 동경하며 아시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아시시에만 천 명이 넘는 수사들이 있었으며, 교황의 지원 아래 유럽 전역에 수도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작은형제회는 신분과 계층을 넘어 도시의 지적 엘리트들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적폐라 할 수 있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에 앞장서게 됩니다. 두 세력의 싸움이야말로 중세 전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역사의 핵심입니다.
포르치운쿨라에 다가가면 성당 정면의 상단에 그려져 있는 벽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건물의 투박한 외관과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은 19세기에 새롭게 그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독일 화가 요한 프리드리히 오베어베크Johann Friedrich Overbeck의 작품입니다. 그림의 내용은 프란치스코가 하늘나라로부터 이른바 ‘아시시의 용서’라는 대사를 받는 장면입니다. 대사는 가톨릭 용어로 면죄부를 일컫습니다. 대사를 통해 죄가 사하여지는 권능이 예수와 성모 마리아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 안으로 걸음을 옮기겠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경건하고 엄숙한 기운에 숨죽이게 됩니다. 거뭇한 벽과 낡아서 반질거리는 가구들은 이곳이 지나온 기나긴 역사를 실감케 합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스무 명 남짓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중앙 정면에 제단이 있고 벽화도 그려져 있어 비좁지만 성당으로서 있을 건 다 있습니다. 단 위에 올라 설교하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아시시에 찾아오는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닌 실제로 존재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만나게 됩니다.
어떤 말이나 설명도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과 사상을 이 성당 자체의 모습보다 잘 대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스러운 존재는 가장 누추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말처럼 낡고 박루한 이곳이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거뭇한 벽 너머로 찬란한 천상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시시가 영적인 도시라면 포르치운쿨라는 그러한 기운의 원류이자 진원지입니다. 수도회에서 포르치운쿨라를 이토록 각별하게 보존하는 이유는 이곳이 수도회를 상징하는 장소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우리 영혼의 증거, 신이 우리 곁에 있다는 생생한 증거로서 이토록 특별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포르치운쿨라 내부에도 작은 벽화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하다고 할 수 없는 이 화가는 포르치운쿨라 안에 고딕풍의 벽화를 남겼습니다. 그림은 이탈리아의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의 그림을 떠오르게 합니다. 화가가 묘사한 성모의 동작과 선의 흐름으로 볼 때 그는 분명 시모네 마르티니의 그림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작은 성당에 그려진 벽화로서는 꽤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특히 천사와 성모의 얼굴을 얼마나 단정하고 곱게 그려놓았는지, 친밀하고 다정한 표정을 바라보다 순간 마음을 빼앗길 정도입니다.
성당을 나오고 한참이 지나도 여운이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작은 형제회가 유럽의 가장 강력한 수도회로 성장한 뒤에도 포르치운쿨라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성당 주변에는 각지에서 온 신도들이 지은 움막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주변 도심의 원형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임종의 순간에 자신을 포르치운쿨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고 이곳에서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천상 세계로 떠났습니다. 이곳의 예배소에는 그가 생전에 입었던 수도복과 노끈 허리띠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곳곳은 성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일화들로 가득합니다. 그중 ‘아시시의 기적’이라 불리는 예배소 뒤편의 장미 정원에 얽힌 이야기가 가장 유명합니다. 기도 중에 육체의 욕망에 휩싸인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책망하며 가시 돋친 장미 덤불에 뛰어들었고 희한하게도 그 뒤로 정원의 장미에서 가시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정원에서는 가시 하나 없이 매끈한 줄기 위에 피어난 붉은 장미를 볼 수 있습니다. 가시 없는 장미가 신기하게 느껴지기보다 성 프란치스코의 고통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장미의 가시를 없애버린 신의 마음이 더 애틋하고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중세의 위인들 가운데 하느님의 옆자리에 앉게 될 단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성 프란치스코를 꼽았습니다. 그가 중세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존경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남아 있는 문헌과 구전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만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정신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하는 방법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 품고 있는 포르치운쿨라를 보는 것, 그 영적인 기운을 직접 느껴보는 것입니다. 아시시가 성 프란치스코의 생을 기리는 기념비 같은 도시라면 그 중심은 바로 이곳 포르치운쿨라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겨우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과도한 장거리 선교 활동이 건강을 해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선종한 지 2년 만에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이듬해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성당을 짓기로 확정되었습니다. 그 성당은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한 아시시의 사형수들을 처형하던 서쪽 언덕 위에 지어졌습니다. 이제 조토의 연작 벽화가 그려진 곳이자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보존하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떠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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