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성과 떠나는 이탈리아 아트 트립: 일생에 한 번은 중세 미술 여행
성 프란치스코 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은 이탈리아의 고전적 균형미와 고딕의 화려함이 조화를 이룬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입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하고 있으면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소박하다는 인상을 받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최대한 장식을 배제한 외양과 백색에 가까운 아이보리빛이 주는 정갈한 인상 때문일 것입니다.
가톨릭의 성지이자 아시시를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지금은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없는 아시시를 상상할 수도 없지만 당시에는 성당 건립을 놓고 신도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업적을 기리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성당의 거대한 규모에 대해서는 평생토록 청빈하게 살아온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거셌습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이 설계도 속의 대성당과 성 프란치스코의 사상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언 또한 ‘다시 가난한 삶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고요.
그렇게 작은형제회를 분열시키고 수사들이 파문되는 등 갈등 끝에 완성된 성당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업적을 드러내면서도 그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외양만큼은 너무 화려하지 않게 꾸며졌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은 당시 유행하던 고딕 양식에 치우치지도 않고 또 너무 무겁고 육중하지도 않으면서 종교의 도시 아시시의 정신과 가치를 담아낸 지금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유럽에는 아름답고 독특한 중세 성당들이 많지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처럼 종교적 가치가 절묘하게 담기면서도 아름다운 비례를 지닌 성당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선종한 지 2년 만에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곧바로 성당의 건립이 추진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작은형제회 출신으로 프란치스코를 열렬히 흠모했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 Gregorius IX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성당이 가톨릭의 성지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228년 7월 17일, 그레고리우스 9세가 주춧돌을 놓으면서 성당의 건립이 공식 선포되었습니다. 작은형제회의 엘리아 봄바르도네Elia Bombardone 수사의 지휘하에 당시 명망 높은 건축가였던 야코포 테데스코Jacopo Tedesco가 설계를 맡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은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독특한 구조를 자랑합니다. 성당은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마치 두 개의 성당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유럽의 대성당들 가운데 이렇게 바실리카가 두개의 층으로 나눠진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독특한 내부의 구조를 따라 나눠진 성당 내부에는 13 ~14세기 거장들의 그림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가톨릭의 성지로서 성당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내부 장식에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였습니다. 수사들은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각지의 유명 화가들을 불러들였습니다.
1253년에 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성당은 중세 시대에 흔치 않은 대규모 예술 프로젝트 장이었습니다. 지역과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탁월한 예술가들이 초빙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프란치스코의 대가Maestro di Francesco라고만 알려진 이름을 알 수 없는 당대의 화가로 그는 이곳에 가장 오래된 프레스코화 몇 점을 남겼습니다. 그 외에도 당시 누구보다 위대한 화가로 칭송받던 치마부에Cimabue도 초빙되었습니다. 그가 아시시에 왔을 때 공방에서 함께 일하던 어린 조토가 그를 따라 아시시로 왔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성당의 1층은 천장이 높지 않고 조도가 낮아서 옅게 깔린 어둑한 분위기가 엄숙함을 자아냅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성당의 내부와 빛바랜 그림들이 뿜어내는 풍경은 중세 시대를 그대로 재현하는 듯합니다. 성당 안을 걷노라면 중세로 시간 여행을 떠나온 듯 황홀한 기분이 듭니다. 한편으로 이곳은 너무나 빼곡하게, 빈틈없이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이 그림이 저 그림 같아 보이고 누가 무엇을 그렸는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중세 회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여기에서 화가의 개성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시 화가들에게는 개성의 표현보다 성화의 형식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 화가는 예술가보다 기술자에 가까웠던 것이죠. 그림에서 화가의 개성이 충분히 드러나는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중세의 성화에서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섬세한 표현이 어려운 프레스코화의 기술적 특성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 회화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이 조금씩 눈에 들어옵니다. 투박하고 단순해 보이는 이미지 속에 그들의 섬세한 기술과 감성, 그 너머의 정신까지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만큼 수준 높고 다양한 중세 벽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습니다. 이곳은 가톨릭의 위대한 성지이면서 또한 진귀한 중세 회화 박물관입니다.
성당 입구를 등지고 왼쪽 첫 번째 예배소에서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벽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시모네 마르티니는 시에나 화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중세의 걸작 〈수태고지〉로 유명한데요, 시에나 화파는 13~15세기에 이탈리아 시에나 지방을 중심으로 번진 화풍으로 물 흐르듯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의 색감과 형태가 특징입니다. 수태고지는 중세 회화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로 대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는 극적인 순간을 뜻합니다. 후대의 수많은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작품으로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는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또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두 도시 시에나와 피렌체는 토스카나 지방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경쟁은 비단 정치와 경제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두 도시는 이탈리아의 예술 양식 또한 양분하고 있었는데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받던 시에나가 고딕 양식을, 교황을 지지하던 피렌체는 조토로부터 출발해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고전주의 양식을 꽃피웠습니다. 참조로 당시 중세의 지배적인 예술 양식은 고딕이었습니다.
고딕 양식과 고전주의 양식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고딕은 선을 강조하고 고전주의는 부피감과 입체감을 중요시합니다. 고딕 양식의 작가들은 유려한 선의 흐름을 통해 리듬감을 드러내고 작품에 신비로움을 드리웁니다.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는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 고딕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세기에 걸친 두 도시의 경쟁이 피렌체의 승리로 종결되었듯이 이탈리아 회화의 패권도 피렌체에서 꽃피운 고전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결론적으로는 이 두 양식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중세 회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한 명의 중요한 중세 화가는 피에트로 로렌체티Pietro Lorenzetti입니다. 그는 시모네 마르티니와 더불어 시에나 화파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두 사람은 시에나 화파의 거장이자 이탈리아 고딕 회화의 선구자인 두초 디부오닌세냐 Duccio di Buoninsegna의 제자였습니다. 이들은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스승인 두초 디부오닌세냐의 화풍을 이어받으면서도 경쟁 도시인 피렌체의 조토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로렌체티의 〈십자가에서 내려짐〉은 신체의 표현과 공간의 구성에서 조토의 영향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1층 바실리카 예술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성당 가장 안쪽의 예배소로 향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그림은 치마부에의 작품인 〈옥좌 위의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이 그림은 그가 남긴 프레스코화 중에 가장 보존 상태가 좋고 작품성이 탁월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가득 메운 프레스코화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품이라면 분명 조토의 연작 벽화겠지만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을 고르라면 치마부에의 〈옥좌 위의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를 꼽겠습니다. 성당 안의 다른 벽화들과는 어딘가 다른, 조금은 무섭고 음산한 느낌이 드는 작품인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치마부에는 먼저 이곳에서 작업을 시작한 화가가 인상적이지 못한 그림들을 남기고 떠난 뒤에 새로 고용된 화가였습니다. 당시 명성과 실력에 있어서 치마부에를 능가하는 화가는 없었으니 그에게 차례가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치마부에는 성당 1층의 안쪽 예배소 벽면과 2층 입구에 드문드문 그림을 남겼습니다. 대부분 감상이 불가능할 만큼 훼손되었는데 그나마 〈옥좌 위의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는 부식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곳에 왔을 때 심각한 납중독 증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납중독은 당시 화가들이 겪는 치명적인 직업병이었습니다. 프레스코화에 사용하는 백색 물감을 만들기 위해 납을 산화시키는 과정에서 화가들이 납 성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 역시 말년에 납중독 증세로 건강이 크게 나빠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치마부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아시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어찌 보면 아시시에서 그가 퇴장하고 뒤이어 조토가 등장하는 것은 치마부에의 시대가 저물고 그다음 세대가 도래할 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치마부에의 그림은 후기 비잔틴 양식을 대표합니다. 비잔틴 양식은 신의 위엄과 존엄,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대표되는데 후기로 갈수록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들이 가미됩니다. 산 다미아노 수도원의 십자가상 예수처럼 뻣뻣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던 모습이 후기 비잔틴에 이르러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는 등 점차 살아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게 됩니다.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치마부에의 십자가상을 보면 두 예수의 모습이 현격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옥좌 위의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에서 그림 속 성모는 비잔틴 시대의 그림과 달리 부드러운 선과 얼굴에 드리운 음영을 통해 여성성과 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프레스코화에서 이례적으로 정교하게 묘사된 옷의 주름은 거장으로 칭송받던 치마부에의 솜씨를 잘 보여줍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표정과 자세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고 사실적입니다. 이런 디테일로 볼 때 치마부에가 얼마나 인물의 동작과 움직임을 열심히 관찰하고 연구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림의 디테일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치마부에의 그림 속 성모는 차갑고 근엄한, 함부로 쳐다볼 수도 없는 위엄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천사의 노려보는 듯한 눈빛에서 드러나듯이 치마부에의 신은 여전히 신의 자리에,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다른 그림과 다르게 조금 무섭고 음산한 느낌이 들 거라고 했던 이유입니다. 신은 인간에게 있어 무서운 존재는 될 수 있어도 친숙한 존재는 될 수 없었던 거죠. 그는 자기만의 개성과 재능을 펼쳐낸 천재였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중세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었고, 그것이 조토와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성당 1층 치마부에의 그림 바로 옆에는 조토의 작품 〈십자가에 매달리심〉이 있습니다. 조금 전 치마부에의 작품과는 대비되는 부분이 바로 느껴집니다. 청색과 금색의 조화가 화사함을 자아내는 것을 보면 조토와 치마부에가 서로 다른 세계관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밝은 색조와 생동감 있는 인물의 묘사가 한결 세련된 인상을 줍니다.
이 작품의 오른편 하단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인물들은 바로 작은형제회의 수사들입니다. 수사들 말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선한 사람들, 다른 쪽에 악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이는 조토 특유의 구성 중 하나입니다. 또한 예수는 다른 인물들보다 좀 더 크고 팔과 다리가 길고 가늘게 그려져 관람자는 예수의 수난에 감성적으로 몰입하게 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남겨져 있다 하더라도 이 성당에서 지하 1층에 보관된 무덤보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성당에 안치된 성프란치스코의 무덤은 전 세계의 신도와 관람객들이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중세로부터 지금까지 가톨릭 성당의 명성을 좌우하는 요소는 성인의 유품,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의 나뭇조각, 열두 제자의 유품 등 어떤 성물을 갖고 있느냐였습니다. 그만큼 성물은 신도들이 순례지를 찾는 중요한 명분입니다. 이는 해당 교구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작용해서 어떤 성물을 소장하고 있느냐에 따라 성당과 해당 교구의 위상이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중세 시대에는 성물 도적들이 활개를 쳤고 가짜 성물을 진짜라고 속이는 간교한 성직자들과 그로 인한 사건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중세의 기독교 사회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갖는 상징성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의 시신에 대해서는 수도회 차원에서 엄격한 보안이 이뤄졌습니다. 그의 시신은 성당이 완공되는 동안 아시시에 있는 산타 키아라 성당Basilica di Santa Chiara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를 탈취하거나 훼손하려는 시도를 무마하기 위해 삼엄한 분위기 속에 한밤중에 이송되었고 시신이 묻힌 장소도 오랫동안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시신 위에 엄청나게 무거운 돌들을 겹겹이 쌓아서 도굴을 막았다고 하니 그야말로 철통 보안이었습니다.
시신이 묻힌 장소가 공개된 것은 19세기, 1818년에 이르러서입니다. 지금처럼 성당 지하 1층에서 볼 수 있는 무덤의 외관은 20세기 초에 설계된 것입니다. 무덤 주위 의자에 앉아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이 성인을 추모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프란치스코 성인이 얼마나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지, 또 그의 삶과 사상의 메시지가 지금까지도 얼마나 강하게 전해지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배소 뒤편의 계단을 따라 2층에 오릅니다. 성당의 2층은 1층보다 두 배쯤 높고 넓습니다. 밝은 빛이 드리운 예배당에 들어서면 마침내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인 조토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 연작 벽화를 만나게 됩니다.
조토는 ‘내게 스승은 자연뿐’이라고 했다지만, 그가 치마부에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우고 화가가 되기 위한 기술을 배운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에는 전문 화가가 되려면 공방에서 필요한 기술을 익혀야 했습니다. 교회나 개인이 주문한 성화를 정해진 형식에 따라 제작할 수 있어야 했고 특히 프레스코화는 공방에서 제작을 경험하고 실습해야만 익힐 수 있는 전문적인 분야였습니다. 프레스코화는 먼저 석회 반죽을 벽에 바르고 그 물기가 마르기 전에 물감을 칠해 그림을 그리는 방식입니다. 그림의 규모가 크고 한번 그려지면 수십 년 이상 그 장소에 있기 때문에 일류 화가들만이 의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가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실력 있는 화가의 공방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벽화를 의뢰받은 화가는 공방의 제자들, 수련생과 성당에 머물며 작업에 돌입합니다. 수련생들은 석회와 물을 섞어 석회 반죽을 만드는 일부터 배웁니다. 화가는 성당의 책임 사제나 수사로부터 작품의 주제나 기획 의도를 듣고 이를 반영합니다. 구상이 끝나면 그는 벽면에 전체 밑그림을 그립니다. 밑그림이 그려진 공간을 잘 나누어 한 부분씩 회반죽을 바릅니다. 회벽의 물기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무엇보다 날이 어두워지면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날씨와 계절에 따라서도 하루에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의 변동이 컸습니다.
그렇게 부분이 채워져 전체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으로 프레스코화가 제작됩니다. 프레스코화는 시간이 제한적이고 한번 그리면 수정이 어려워서 나무 패널화처럼 섬세한 표현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문자의 기대에 맞도록 수준 높은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난이도가 무척 높은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가들은 프레스코화의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마른 벽면에 화학 약품이 섞인 물감을 바르는 세코 프레스코 기법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물기가 마른 뒤에 천천히 그려도 되니 더욱 섬세한 묘사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물감이 빨리 부식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 방식으로 그려진 대표적인 작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작품은 오래 전에 물감이 떨어져나가 지금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습니다.
치마부에 또한 물감 개발에 집착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조토는 작품 대부분을 기존의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덕분에 조토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조토가 기존의 방식을 고수한 것은 선견지명이라기보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빠르고 간결한 붓질로 인물에 형상을 부여하고 동작을 그려내는 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얼굴의 표정에 있어서 섬세한 묘사가 가능했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감상할 때는 무엇보다 그의 붓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시시의 벽화들은 조토의 그러한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작품입니다.
프레스코화는 공간의 크기만큼 작업량이 많기 때문에 공방 제자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배경의 자연이나 건축물의 묘사, 군중의 일부 등을 할당받아 그리게 됩니다. 어떤 경우 제자들이 거의 모두 작업하고 마스터는 표현하기 까다로운 옷 주름이나 동작, 그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눈매와 표정만 직접 그리기도 했습니다. 조토 역시 선택적으로 작업하면서 제자들에게 많은 부분을 맡겼습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숙련된 제자들을 얼마나 많이 거느리고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아시시에서의 성공 이후 조토는 피렌체에서 가장 큰 공방을 운영하게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10년 이상 공방을 지키며 그의 작품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조토의 화풍을 계승한 진정한 의미의 제자들로 조토의 그림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그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시시에서 작업할 당시에는 그런 숙련된 제자들이 적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시시에 있는 조토의 연작 벽화는 완성도에 있어서 편차가 크고 전체적인 통일성도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조토의 명성을 믿고 아시시에 찾아온 관람객 중에는 간혹 당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림의 무엇이 대단한 것인지, 그림을 보며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 그림에서 정서적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 조토는 재능 있는 젊은 작가였지만 완성된 예술가는 아니었습니다. 아시시의 수사들이 조토에게 작품을 의뢰한 것은 수도회의 이념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조토의 벽화가 가진 진가를 알기 위해선 당시의 시대배경과 조토의 작품 세계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 연작 벽화는 중세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성프란치스코의 제자였던 성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당시 나와 있던 성 프란치스코 전기 가운데 가장 내용이 충실하고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조토가 지향한 사실적인 그림들은 서민적이고 개혁적인 성 프란치스코의 철학과 사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습니다. 조토에 의해 완성된 성당 2층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은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형식과 파격적인 시도로 중세 사회에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유럽 가톨릭 세계에 조토의 이름이 깊이 각인됩니다.
이 혁신적인 작품은 아시시의 큰 자랑입니다. 각각의 일화들이 이야기로 연결되는 스토리텔링 방식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획이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으며 무엇보다 보통 사람들처럼 기뻐하고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조토의 위대함은 중세의 어둠을 뚫고 마침내 살아 있는 인간을 회화에 담아낸 것에 있습니다.
그는 배경의 건물을 건축가가 도안을 그리듯 정교하게 그렸으며 숲이나 산과 같은 자연을 비중 있게 묘사했습니다. 건축물의 묘사가 지금의 우리 눈에는 대단치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 전 중세 시대의 화가들은 하지 못한 작업이었습니다. 배경을 그렇게 자세하게 그리는 일은 굳이 하고 싶지 않은 까다롭고 번거로운 작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죠.
조토는 실제 세계를 회화에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연작 벽화의 첫 번째 그림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광장의 시청 건물과 미네르바 성당을 배경으로 서 있습니다. 이것은 그림 속 이야기가 실재했다는 사실감을 높여주고 박진감을 부여합니다. 조토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인물의 입체적인 자세와 구도 또한 그림에 깊이감을 더해줍니다. 뒤돌아선 자세, 빙 둘러앉아 있는 모습, 침대 아래에 앉아 있는 자세, 뒤돌아 앉아 있는 자세는 회화에 3차원적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조토는 공간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평생토록 공간의 문제에 천착했지만 안타깝게도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중세의 벽화 속 인물과 건물의 비례가 맞지 않는 까닭으로 중세의 그림은 현재의 눈으로 보았을 때 매우 어색하고 예술적으로 미숙해보입니다. 그러나 회화에서 3차원적 표현이 15세기에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로소 발전된 것을 감안하면 중세의 기준에서 조토의 그림은 매우 앞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조토의 예술이 성 프란치스코 사상의 회화적 구현이라고 할 만큼, 그가 그림에 담아낸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 바로 휴머니즘이었습니다. 조토가 활약한 13세기 말, 14세기 초는 최초의 휴머니스트라 불리는 시인 프란치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등장하며 인간의 본능과 감정에 대한 탐구와 표현이 꽃을 피우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엄숙하게 신만 바라보던 중세 사람들은 휴머니즘에 열광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휴머니즘이 유행하기 전, 그 토대가 되는 씨앗을 뿌린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의 사랑을 설파하는 동시에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도 열심히 이야기했습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성 프란치스코를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프란치스코 성당의 연작 벽화는 격변하는 중세의 시대상과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엿볼 수 있는 역사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연재글에서는 하나씩 그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를 태어나게 한
이탈리아의 국민 화가 조토를 만나다
일생에 한 번은 중세 미술 여행:『이틀리아 아트 트립』읽어보기 http://gilbut.co/c/20014741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