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작고 허름한 한 성당에서 잉태된 기적

김현성과 떠나는 이탈리아 아트 트립: 일생에 한 번은 중세 미술 여행

by 더퀘스트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프란체스코와 베르나르드, 피에트로는 아시시 아래로 3킬로미터 떨어진 안젤스의 성모 마리에서 새로운 숙소를 마련했다. 세 사람은 나뭇가지, 나무토막, 갈대와 진흙 같은 소박한 재료들을 모아 작은 오두막을 지었다. 예배당에서 일하는 동안 기거할 곳이었다. - 마크 갈리, 《성 프란체스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은 아시시 기차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의 외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지금이야 성당 주변에 주택과 상가 건물들이 즐비하지만 중세 시대에 이곳은 농사를 짓는 평원이었고 드문드문 허름한 가옥만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당시에 성곽의 밖에서 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언제 도적들이나 괴한에게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성 바깥은 무엇이 존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도시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시민들이 살았으며 자발적으로 이곳에 살려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요즘 말로, 성곽을 기준으로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인싸’, 그 밖은 ‘아싸’의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은 자발적으로 ‘아싸’의 길을 선택한 특별한 수사들의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article13_안젤리성당.bmp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성당에 다가설수록 거대한 규모에 놀라게 됩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성당이라는 교회 측의 설명이 허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중세 도시는 하나의 성당이 하나의 도시를 의미하는데 아시시처럼 작은 도시에 성 프란치스코 성당 외에 또 다른 대성당이 있는 것이 의아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성당의 외관입니다. 건물의 정면을 파사드Facade라고 하는데, 이곳의 파사드는 아시시에서 놓쳐선 안 될 볼거리입니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성당이 이탈리아의 여느 대성당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챌 것입니다. 육중하고 고풍스럽기보단 날렵하고 세련된 외양입니다. 멀리서 볼 때 성당이 실제 규모보다 작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디자인의 특징 때문입니다.


성당의 외관이 다른 성당들과 다른 것에는 지어진 시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대성당들은 대부분 중세의 전성기인 13~14세기에 건축되었고 당시 유행하던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 속에 지역적 특색에 따라 디자인이 조금씩 변주되었습니다. 도시마다 대성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후 전개된 매너리즘 양식과 바로크 양식은 소규모의 교회나 고급주택 등에 적용되었습니다.

article14_안젤리성당파사드.bmp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파사드

매너리즘 양식은 다른 예술사조에 비해 조금 낯설게 다가올 것입니다. 매너리즘은 예술을 위한 예술,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예술을 추구합니다. 특히 회화에서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인체를 길게 늘이고 표면을 차갑고 창백하게 함으로써 신비롭고 감각적인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건축가 갈레아초 알레시Galeazzo Alessi가 디자인한 산타 마리아 안젤리 성당은 매너리즘 건축물 가운데 드물게 대성당 규모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또 그 예술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 특별한 건축물입니다. 유럽 내에서도 흔하게 만나기 어려운 작품으로 아시시의 숨은 보석이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성당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아시시에 또 다른 대성당이 지어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막대한 부를 버리고 성스러운 삶을 택하다


앞에서 설명했던 아시시와 페루자의 전쟁 기억하시죠? 그 전쟁에서 페루자군의 포로로 잡혔던 프란치스코는 가족이 낸 보상금으로 1년 만에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오게 됩니다. 중세의 신학자인 성 보나벤투라San Bonaventura가 쓴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에 따르면, 그 무렵 프란치스코는 기사도를 숭배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가도 깊은 환멸을 느끼며 비통해져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article15_조토의벽화.bmp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를 그린 조토의 벽화

신의 사랑에 눈을 뜬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오래된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매일 기도를 올렸고 어느 날 십자가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프란치스코야, 너는 가서 내 집을 복구하여라. 무너져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프란치스코는 그때부터 신의 집을 복구하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첫 번째 소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조토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벽화에서 낡고 방치된 당시의 교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림 속 젊은 프란치스코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곳은 산 다미아노성당(지금은 수도원)입니다. 건축물의 묘사에 정확성을 기하는 조토의 특성상 지붕과 벽면이 떨어져 나간 모습은 과장이 아니라 회화적 추상의 표현일 것입니다.


12세기에는 도시 외곽에 흉물스럽게 방치된 교회를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긴 중세의 어느 시기엔가 사용되다가 버려진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보수하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했습니다. 혈기 넘치던 청년 프란치스코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모금 운동을 벌였고 때로는 아버지 상점의 옷감을 가져다 팔고 타고 다니던 말까지 팔아서 결국 돈을 마련했습니다. 성공한 상인으로 코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의 아버지는 거지 꼴에 가까운 누추한 행색으로 돈을 구걸하며 다니는 아들을 잡아다 매질하고 지하실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아 유럽 최고의 상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막대한 재산에도 권력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사업차 프랑스로 떠난 사이에 또다시 상점의 물건을 내다 팔았습니다. 이에 대노한 프란치스코의 아버지가 아들을 고소하면서 아버지와의 재판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article16_조토의벽화.bmp 프란치스코와 아버지의 재판을 그린 조토의 벽화


이날 성 프란치스코는 가진 돈과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내놓으며 “나에게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재판은 성 프란치스코가 속세와 완전히 절연하고 신앙인의 길을 걷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꼽힙니다.


교회 재건 운동을 이어가던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고요한 숲 가운데 에 폐허처럼 남아 있는 작은 교회를 발견합니다. 사람이 지나다니지도 않은 외진 곳이어서 ‘작은 땅’이라는 뜻의 ‘포르치운쿨라’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곧 무너질 것 같은 작은 교회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를 따르던 두 명의 동지와 함께 포르치운쿨라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서 교회를 수리하며 움막에서 함께 생활합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원래 베네딕도회의 소유지였습니다. 베네딕도회는 6세기경에 성 베네딕도Sanctus Benedictus de Nursia가 세운 유서 깊은 수도회입니다. 수도회는 자발적으로 성 밖에 내려온 귀족 출신 청년들이 이곳에서 지내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곳에서 성 프란치스코회, 다른 이름으로 ‘작은형제회Ordine dei Frati Minori’의 선교가 시작됩니다. 이들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둘씩 짝을 지어 원정을 다녔고 돌아올 때면 서너 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형제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중세의 역사를 써나가게 될 작은형제회가 태동하게 됩니다. 작은형제회는 우리나라에도 1930년대에 전파되었는데, 현재 ‘꼰벤뚜알’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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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를 태어나게 한

이탈리아의 국민 화가 조토를 만나다


일생에 한 번은 중세 미술 여행:『이틀리아 아트 트립』읽어보기 http://gilbut.co/c/20014741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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