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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May 15. 2022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22.5.15) 부부의 세계, 미안하다 사랑한다, 정지돈

  동거묘인 자이언트 랙돌 하릅은 시간만 나면 거실의 빈백에 누워 있다가 그것이 지겨워지면 방 안의 라텍스 매트리스로 장소를 옮겨서 눕는다. 뭐 하는 거야? 라고 물어보면 쉬러 가는 중이라고 대답한다. 지금까지 쉰 거 아닌가? 이런 의문이 가득 찬 눈으로 응시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나는 특단의 조치로 쉬고 있는 하릅에게 정지돈의 단편집 ‘내가 싸우듯이’ 던져주는 미션을 감행했는데, 첫 번째 단편 ‘눈먼 부엉이’를 미처 다 읽지도 않고는 책을 손톱으로 갈기갈기 찢으며 하악거렸다.(내가 제일 아끼는 단편집이기 때문에 한 권을 더 주문해야만 했다.) 눈먼 부엉이를 읽다가 성난 고양이가 되겠다며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눈먼 부엉이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웃기고 재미있는 단편이다. 예를 들면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구절은 도저히 참기가 힘들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

  나는 하릅이 결국에는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까지 읽어서 난독증의 4D 체험까지 할 수 있길 바랐으나 그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단편에는 한 문장이 거의 한 페이지가 되는 프루스트식 시도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레이몽 루셀의 책을 번역한다는 불가능에 도전한 것은 고맙고, 결국 번역해서 나왔으니 불가능은 아닌 셈이지만 결과물을 보면 불가능은 불가능이구나 같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옮긴이의 해설에서 알게 된 레이몽 루셀의 아둔하고 열정적인 삶, 첫 소설을 쓰고 난 뒤에 자신의 펜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그 빛을 누가 볼까 두려워 허겁지겁 커튼을 쳤으며, 글이 안 써질 때는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는 삶이 너무 좋아서 온갖 비문으로 점철된 책임에도 꾸역꾸역 읽고 있는데, 아무리 읽어도 내용이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후략> ]

  나는 이 부분을 하릅이 읽으면서 눈빛이 점차 몽롱해지는 상상을 하며 희열에 가득 차 있었으나 이룰 수 없어 아쉬웠다. 두 번째 미션으로 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하릅에게 권하며 이건 정말로 재미있다니까, 하며 억지로 끼워 넣는 학습지처럼 하릅에게 밀어 넣었다. 하릅은 내 얼굴에 크로스로 손톱자국을 내긴 했으나 약 세 달간 절반을 읽는 노력을 하며 내 기대에 부응을 해 주었는데 특히 오늘은 드디어 하릅이 정지돈의 산문집을 읽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성과가 있었다. 그 부분은 나도 이 책에서 꼽은 최고의 개그 장면인데 정지돈이 코로나19로 극장에 갈 수가 없어 욕구불만이 가득 차 그에 대한 갈증 해소로 넷플릭스를 켜게 되고 호기심에 의해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보게 된 장면이었다. 묘사는 다음과 같다.

  [소지섭의 여자 친구 최여진이 소지섭을 버리고 다른 남자랑 결혼하자 결혼식을 찾아간 소지섭은 이렇게 말한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김치가 없어.” 그러자 최여진이 말한다. “사 먹어.”소지섭은 소리친다. “네가 담가준 김치 아니면 안 먹어!!” <중략> 이 기이하고 추상적이며 극단적인 드라마는 겨우 십육 년 전에 만들어졌고 우리는 크나큰 충격을 받으며 드라마를 껐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없으므로 이 세상 드라마를 필사적인 결의로 모두 시청하고 있는 하릅에게 물었다. 진짜 이런 장면이 나와? 최여진이 호주에서 남자 친구를 위해 김장까지 할 줄 아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전통문화 계승자라는 설정도 굉장했지만 그 김치가 얼마나 맛있으면 소지섭이 전 여자 친구의 결혼식까지 찾아갔을까 하는 매콤한 놀라움도 뒤따랐다. 이혜정 요리연구가의 결혼식에는 대체 몇 명의 전 남자 친구가 찾아왔을까

  하릅은 숨넘어갈 듯 웃으며 갑자기 정색하고는 음 그런 대사가 나오긴 나와. 근데 그때는 분명히 명대사라고 생각했는데...라고 말을 줄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대사라고 생각했다고? 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시 책을 두어 장을 더 읽더니 정말 더 이상은 못 읽겠다며 책장을 덮었다. 다행히 나중에 더 읽을 생각은 있는지 손톱으로 찢어 버리지는 않았다.

  사실 나도 얼마 전에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드라마를 통 보지 못하는 얇은 인내심을 수련하기 위해 어디선가 웰메이드라고 들었던 ‘부부의 세계’를 시작해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는데, 폭우가 쏟아지던 밤 출장에서 돌아온 이태오가 씻지도 않고 지선우가 곤히 잠들어 있는 침대에 올라간 것이다. 손은 닦았을까 하는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격렬한 키스를 할 때는 아 부디 이는 닦고 들어온 것이길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제발 침대에는 씻고 올라가란 말이야 제발! 나는 두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가정사랑병원의 부원장이면서 가정의학과 전문의의 남편이 저런 기본적인 위생관념조차 없다니 도저히 몰입이 되지 않았다. 집도 돈도 없이 어쩔 수 없는 노숙자들의 사랑도 아니고 저런 대저택에 사는 부르주아이자 지식인들의 사랑이 어떻게 저리 흉측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아침이 되고 티셔츠를 입은 채로 부스스하게 일어나는 이태오를 보면서 과연 한밤의 불타는 과업을 모두 마친 후에는 제대로 씻고 누웠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가 시나리오 작업을 다시 한다면 일단,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라고 따지고 드는 이태오의 따귀를 날리고 샤워부스에 집어넣은 후 이렇게 바꾸고 싶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출장에서 돌아온 이태오는 일단 본인의 짐가방을 풀고 세탁물을 세탁 바구니에 넣은 다음 완벽히 탈의를 하고 샤워부터 한다. 샤워를 할 때는 샴푸와 비누칠을 꼼꼼히 하고 비눗기가 없이 깨끗이 헹궈준다. 그리고 칫솔질을 3분간 꼼꼼히 하고 나서는 보습을 위해 로션을 바르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잘 말려준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침대에 누워있는 지선우와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지선우가 잠이 든 지 오래되었다면 입에서 냄새가 날 수 있으므로 코를 가까이 대고 구취를 확인 후, 정도에 따라 가글을 하고 올 것을 요청한다. 그것이 귀찮다면 키스는 스킵하도록 한다. <중략> 사랑이 다 끝나고 난 이후에는 침대 시트가 더러워졌는지 잘 살피고 만약 흔적이 남았다면 위생을 위해 깨끗한 시트로 갈아준다.(이 작업에는 부부의 탄탄한 팀워크가 다시 필요하다.) 그리고 지선우와 이태오는 차례대로 샤워실로 들어가서 깨끗하게 몸을 헹군 후에 다시 잠이 든다.


※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부부의 세계 (JTBC)

미안하다, 사랑한다 (KBS2)

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정지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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