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A는 사는 것이 마음 같지가 않다. 출근을 해서도 점심시간에 잠깐씩, 퇴근을 해서도 쉬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데 기대한 만큼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목숨까지 내걸고 하는 사람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이 이해는 되지만 이건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을 정도로 반응이 없어도 너무 없다. 적당히 봐주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뭔가를 '했다'는 성취감도 있고 재미도 있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 자괴감만 들뿐이었다.
A의 주변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본업이 있지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부업 또는 취미로 삼고 있다. 춤, 노래, 글쓰기, 운동, 유튜브 등 그 종류는 수도 없이 많지만 다들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다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콘텐츠로 만들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만 A와 마찬가지로 그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 보인다.
그러다 보니 도중에 포기한 사람도 제법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도 않고 반응이 없으니 다들 의욕이 많이 꺾인 모양이다. 최근에 만난 C는 그 상태가 제법 심각하다. 원래는 무엇이든 뜻하는 게 있으면 일단 덤벼서 해내고야 마는 하고재비였지만 이제는 물 먹은 볏단처럼 축 늘어져 있고 어딘가 힘겨워 보였다.
"요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 "야, 너 같은 하고재비가 웬일이냐." "해도 해도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뭐."
학습 딜레마란 학습은 실패에 의존하며 시행착오와 실패는 새로운 해결책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러드와 밀러는 세상은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학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피아제는 성숙은 단지 지적 발달을 위한 틀만 제공하며, 정신적 발달을 위해서는 이러한 틀 위에 생리적 경험과 사회적 경험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A는 어떤 것을 '했다'라고 한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보상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니까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런 보상이 없다면 또 무언가를 시도해야 하고 보상이 발생할 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피아제가 말했던 사회적 경험이라는 게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까? 모르기 때문에 알아야 하고 안되니까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지만 성공하기 위해서 실패해야 한다니! A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A는 성공도 실패도 거부하기로 했다.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해냈다'는 그 사실 하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되겠지.' '이번에 안됐으니까 다음엔 이렇게 하면 되겠지.'
이런 마음들 조차 내려놓았다. 그저 무언가를 해냈다는 그 성취감과 뿌듯함만 챙기고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결과물에 대해서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했다. 실패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했으니 실패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학습 딜레마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A는 더 시간을 쪼개서 쓰기로 했다. 출퇴근하는 길에, 화장실에 잠시 앉아 있을 때, 잠들기 전에 잠깐, 일어나서 또 잠깐 자신이 쓴 글을 보며 뿌듯해하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더 자주 생각나게 하고 더 자주 들여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로 했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을 때, 마지막 소절을 불렀을 때, 마지막 안무를 마무리했을 때, 영상의 엔딩씬의 편집을 끝냈을 때는 누구나 기분이 좋다.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해서 얻은 결과물을 마주했을 때는 그것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손을 떠난 그 결과물은 더 이상 나의 영역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