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이방과

내 의지와 무관한 것들 속에서

by THE RISING SUN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는 1357년 7월 26일 고려 동계군 동북면 함주목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8남 5녀 중 차남, 어머니 신의왕후의 6남 2녀 중 차남이다. 이름은 즉위 후 피휘(避諱)를 위해 경(曔)으로 개명됐고, 묘호는 사망 후 260년이 지난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받을 수 있었다. 세종이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찬양하기 위해 편찬한 용비어천가의 해동육룡에 이방과는 포함되지 않는다.


차남 이방과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장남인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 1354 ~ 1394)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이지란이 저자인 <청해백집>의 기록을 근거로 한 ‘이방우 고려충신설’에 대해서는 반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들이 있다. 다만 부모에겐 효를 다했고 형제들과 우애가 두터웠으며 시, 서가 깊었다고 전한다. 술을 좋아해서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사망했다.


장남 이방우 다음엔 오남 이방원이 고려되어야 한다. 장자의 명분을 가진 이방우와 강한 의지와 힘이라는 실용을 가진 아우 이방원 사이에 낀, 차남 이방과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기록을 근거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기록하던 당시 어떤 주관, 의도 등이 개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둘째, 해석하는 현재의 어떤 편견, 오역 등의 가능성도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최대한 객관적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첫째, 당대의 여러 자료들을 교차 분석해야 하고, 둘째, 인물과 사건의 전후, 좌우를 종합적으로 살펴 맥락을 짚어야 한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장례 때 이방과를 배제하고 자신이 상주가 되었고, 세종은 이방과를 선대왕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정종이라는 묘호도 사후 260년이 지나서야 주어질 만큼 그는 후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런 인물에 대한 긍정적 기록들은 일단 믿어볼 만하다. 또한, 그런 긍정적 평가가 불순한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한 정치적 목적과 무관한 내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방과는 약관을 갓 넘긴 1377년 아버지를 도와 지리산에서 왜구를 격퇴했고, 1380년 황산대첩에도 동행했다. 개경에서 활동하던 장자 이방우 대신 동북면에서 영지를 관리하고 가별초를 이끌었으며, 조선 개국 이후인 1393년에도 왕자의 신분으로 문화현, 영녕현에서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방과는 재위 기간 격구와 사냥을 즐겼는데, 대간이 격구를 비판하며 “태조가 환관의 꾐에 빠져 격구를 궁에 도입했다”고 간하자, “내 허물을 가지고 왜 부왕을 욕되게 하느냐”며 화를 냈고, 사냥을 나가 짐승을 잡으면 언제나 중도에 사람을 시켜 태조에게 보냈다.


이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는 군사를 물리라며 꾸짖었고, 난을 진압한 이방원이 처분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그래도 어려울 때 기댈 것은 골육지정, 피붙이밖에 없다.”며 선처를 당부했다.


상왕 시절, 이방원이 원경왕후와 사이가 틀어져 후궁을 들이는 가례(嘉禮)를 올리려고 하자, “금상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하나? 내 비록 아들(적자)이 없어도 소시(少時, 젊었을 때)의 정으로 인해 차마 장가를 다시 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금상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뭐 해?”라고 만류하여, 이방원은 가례색을 폐하고 조용히 후궁을 들였다. 세종 즉위 후 태상왕 호칭이 논의되자, 태종보다 나이가 많을 뿐이라는 이유로 노상왕으로 부르게 하였다.


정안왕후 김씨 사망 후 이방원이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던 중에 갑자기 ‘먼저 간 아내가 떠올라 혼자 즐기지 못하겠다’고 잔치를 파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첩 중에 바람기가 많았던 기매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가짜 내시와 바람을 피운 것이 들통나 이방원이 죽이려고 하자 살려주었고, 누구의 핏줄인지도 알 수 없는 기매의 아들도 끝까지 보살펴주었다.


어쩌면, 이방과는 권력이 그 비정함을 칼과 피로 입증하던 조선 건국 전후, 아버지를 잘 보좌하고 동생들을 잘 챙기며 왕권 다툼으로 흔들리던 집안을 지킨 균형추이자 안전판이었는지 모른다. 기록에 의하면 이방과는 이성계를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었다. 체구가 곰처럼 크고 강건하였으며, 왼쪽 눈 밑에는 큰 사마귀가 있었다고 한다. 세종이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집현전(集賢殿)은 정종이 경전 강론을 위해 1399년 설치하였고, 한성부에서 개성부로의 천도도 형제들 간의 골육상쟁을 마음 아파했던 정종이 했던 일이다.


한편 역사가 스치듯이 기록한 인물들도 있다. 이방원의 동복 막내인 덕안대군(德安大君) 이방연(李芳衍, 1370 ~ 1388 추정)은 이성계의 아들들 중에서 이방원이 유일하게 과거에 합격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1385년 을축방 문과에 동진사 14위로 급제하여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됐던 인재였다. 명태조실록에 ‘왕이 노하여 성계의 자식을 죽였다’는 서술을 근거로 위화도 회군 직후 우왕에 의해 처형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혼하지 않았고, 그 어떤 자세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방원의 셋째 형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1360 ~ 1404) 역시 다른 형제들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야심이 적어 넷째 이방간(李芳幹, 1364 ~ 1421)과 다섯째 이방원이 2차 왕자의 난으로 싸울 때에도 중립을 지켰다. 평소에 시사를 말하지 않았고 술자리에서도 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닫아버렸다고 전한다.


살다 보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들, 흘러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횡재와도 같은 몹시 탐냈던 것일 수도 있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비관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묵묵히 지키고 걸어가야 할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5화이성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