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라는 대통령
여기 세상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나라가 있다. 외침은 끊이지 않고, 내정은 무기력하다. 백성들은 언제 죽을지 몰라 늘 불안하고 당장의 끼니가 없어 늘 배고프다. 유일한 희망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제사장을 뽑는 일이다. 5년마다 제사장을 뽑는 축제가 열린다.
역사에는 신화 같은 제사장들이 있었다. 한 제사장은 주변국들을 제압하고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여 나라를 최강국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또 한 제사장은 최고의 문자를 만들고 시계를 발명하여 문화와 과학을 융성케 하였다. 나라의 문명을 온 세상에 드리웠다. 그리고 또 한 제사장은 공업과 상업을 일으켜 나라 안에 둘 곳이 없을 만큼 큰 부를 쌓았다. 백성들은 그런 제사장의 재래를 고대하며 축제를 기다린다.
제사장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제사장이 되려는 자는 깨끗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검증받는 과정에서 어떤 공격이 어떻게 들어올지 알 수 없다. 수많은 도전자들이 평생 쌓아온 것들을 빼앗기고 패가망신하고 목숨을 잃고,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 모든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오직 한 사람이 제사장이 된다.
제사장으로 결정된 후 등극하기까지는 축제기간이다. 외적을 방어할 군비가 부족하고 곳곳에 기근이 속출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국고를 탈탈 털어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 온 나라가 새 제사장을 갖는다는 환희로 들끓는다. 백성들은 새 제사장이 예의 그 최강국, 최고의 문명국, 최고의 부국을 부활시킬 것이라 굳게 믿는다. 온 백성의 거대한 열망이 제사장 한 사람의 어깨에 지워진다.
제사장은 축제기간 온 나라와 온 백성의 존경과 추앙과 숭배를 받는다. 제사장은 비단과 금은보화로 온몸을 치장하고, 성스러운 사원의 성스러운 방, 성스러운 의자에 앉아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성스러움을 잃지 않기 위해 발이 땅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굶주린 백성들이 진상하는 이슬과 서리 맞아 익은 다래와 흰 사슴의 혓바닥을 먹었다.
축제의 피날레, 제사장의 등극식은 제사로 치러진다. 제물은 제사장이다. 온 백성의 열망을 이뤄내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 불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부활하여 불 가운데서 걸어 나온다. 이 순간 축제는 절정에 달한다. 이쯤 되면 백성들은 최강국, 최고의 문명국, 최고의 부국으로의 부활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물론 이건 퍼포먼스다. 제사장 부활의 진실은 제사장과 그를 둘러싼 장로들만이 알고 있다. 비밀을 자손 대대로 지킨다는 조건으로, 장로들의 지위는 세습된다. 제사장은 바뀌어도 장로들은 바뀌지 않는다.
제사장이 바뀌어도 나라는 바뀌지 않았다. 외침은 계속됐고 백성들은 늘 배곯았다. 그제야 백성들은 또 속았음을 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언제나 그랬듯이 다음 축제를 기약한다. 전지전능하다며 온 백성의 운명을 짊어졌던 제사장, 성스럽다며 온 백성의 존경과 추앙과 숭배를 받던 제사장, 스스로 제물이 되어 자신의 부활로 나라의 부활을 입증했던 제사장은, 이제는 온 나라에 들끓는 원망과 저주와 냉소를 한 몸에 받아내는 제물이 되었다.
제사장에서 내려온 자는 가족에게도, 고향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 그 부정함으로 인해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을 망하게 한다는 속설 때문이다. 입에 넣을 것도 몸을 누일 곳도 찾지 못해, 온 나라를 떠돌며 구걸하지만, 이제야 백성들의 곤궁을 인식하지만, 이미 늦었다. 제사장에서 내려온 자는 돌에 맞아 죽거나, 배를 곯아 죽거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스스로 몸을 던져 죽는다. 그 죽음 너머로, 저 멀리 축제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