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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도 정치가 망친다

오로지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by THE RISING SUN

세계 랭킹 1위 안세영이 프랑스 오를레앙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며 말레이시아 오픈, 인도 오픈에 이어 국제대회 3연승을 달성했다. 더 놀라운 건 경기 내용이다. 안세영은 올해 들어 사실상 무패, 무실세트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유일하게 패한 세트가 오를레앙 마스터스 4강전 1세트다. 중국의 가오팡제와의 대결이었는데 1세트를 20-22로 내준 뒤, 2세트, 3세트는 각각 21-7, 21-14로 제압했다. 시간도 압도적이다. 32강 44분, 16강 39분에 이어 한때 천적이었던 중국의 천위페이와의 결승은 36분 만에 끝냈다. 세트 스코어는 21-11, 21-12였다. 안세영은 앞서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땄었다. 1996년 방수현 이후 역대 두 번째이자 28년 만의 여자 단식 금메달이었다.


파리올림픽 시상식 후 기자회견에서, 안세영은 대한배드민턴협회의 부조리를 폭로하였고, 국가대표팀을 탈퇴해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할 의사를 내비쳤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대표다. 어떻게 이겨서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의 성원에 보답할지, 그 부담만으로도 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중압감을 느낄 것이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선수다. 온전히 경기에만 집중하고, 즐기며 실력을 뽐내고 그래서 당연히 승리할 수밖에 없어야 할 기회를 도대체 왜 빼앗으려는 것인가? 언제까지?


때로는 부분이 전체를 대변하는 경우가 있다. 2018년 7월 중국 세계선수권 대회 때, 참가 선수 6명은 이코노미석에 태우고 8명이나 따라간 협회 임원들은 비즈니스석을 이용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직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그 외에도 협회에 대해서는, 실력이 아닌 협회의 개입으로 대표팀을 선발하고, 올림픽 출전 선수의 무릎 부상을 사실상 방치해 악화시키고, 국가대표 선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제대회 불참 조치를 하고, 국가대표팀 내 갑질 등 악습에 눈감았으며, 보조금 관리법을 위반하고, 기부·후원물품 관리 규정을 위반하는 등의 부조리 의혹이 제기됐고, 정부의 조사가 진행 중이다.


때로는 부분이 전체를 대변한다고 했는데, 대한배드민턴협회의 민낯은 그대로 우리 체육계의 현실이고, 체육계의 부조리는 또한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정치지배 현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선수는 운동만 잘하면 된다. 선수는 오직 성적으로만 말하게 해주어야 한다. 협회든 정부든 거기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고 환경을 조성해 주면 된다. 그게 본질이고 순리다. 그런데 왜 자꾸만 부당하게 개입하고 방해하고, 또 슬쩍 숟가락 얹고, 대놓고 이용하기까지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선수가 개성이 너무 튄다, 전체를 위한 희생도 필요하다, 관행이었다는 등의 반응이 나온다. 왜 우리 사회는 항상 비본질이 본질을 밀어내고, 역리가 순리를 밀어내고, 수단이 목적을 밀어내는 것인가. ‘정치가 문제다’에서도 썼듯이, 원인은 언제나 정치다. 다른 데도 아니고 ‘오로지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가 근본정신이자 모토인 체육계에까지 정치를 끌고 들어가서 이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게 더 화가 난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에게 미안하다.


체육계에 자리 잡은 정치지배 현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대한배드민턴협회 규정상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나가려면 국가대표 경력 5년 이상에 여자는 27세 이상이어야 한다. 나이 제한의 경우 2018년까지는 ‘국가대표가 아닌 남자 31세, 여자 29세 이하 선수의 국제대회 출전 불가’ 조항이 있었으나 재판까지 간 끝에 나이 제한 규정이 효력을 잃었었다. 그런데 2019년에 남자 28세, 여자 27세로 두 살 낮춘 현재의 규정을 다시 만든 것이다. 협회는 “규정이 무시될 시 국가대표 선수들의 대표팀 이탈 우려가 상당히 많으며, 국가대표 운영이 어려워진다.”고 했지만, 드러난 상황으로 볼 때 국가대표 운영은, 실력 있는 어린 선수들 붙들어놓고 이용하려는 허울 좋은 구실로 밖에는 안 보인다.


올림픽 남자단식에서 3번 연속 금메달을 딴 덴마크의 빅토르 악셀센은 도쿄올림픽 직후 국가대표팀을 탈퇴하고 두바이로 이주해 개인 코치 및 트레이너들과 계약했다. 덴마크 배드민턴 협회는 악셀센의 결정을 지지했고 이후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 트로피를 휩쓰는 동안 협회나 정부는 어떠한 형태의 제동도 걸지 않았다. 악셀센은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덴마크 국가대표팀에 복귀했고, 다시 고국에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사실 국제대회 개인 자격 출전 이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0여 년 전에도 이용대 선수 등이 같은 주장을 했었고, 당시 체육계의 고질적 병폐인 ‘용품업체의 스폰서십’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함께 있었다. 이 역시 협회가 선수들의 발목을 붙잡는 중요한 이유다. 협회는 선수들이 특정 업체의 용품만 사용하도록 하는 대가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는다. 협회는 일부 선수의 개별 후원을 허용하면 스폰서 업체의 후원 규모가 크게 줄어 선수 육성이나 국제대회 출전비용 등을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항변한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적립한 자금을 선수를 위해서만 사용할 때 할 수 있는 얘기다. 선수의 부상을 방치하고, 이코노미석을 타는 출전 선수보다 더 많은 수의 임원들이 비즈니스석을 이용하면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다. 한편 일본은 경기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용품은 선수들이 개별적으로 선택하고, 그런 용품 계약을 통해 수입도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와 비교되는 일본의 체육계를 살펴보자.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 일본은 금메달 20개를 포함한 총 메달 45개로 3위, 우리는 금메달 12개를 포함한 총 메달 32개로 8위였다. 앞서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도 일본은 금메달 27개를 포함한 총 메달 58개로 3위에 올랐고, 우리는 금메달 6개를 포함한 총 메달 20개로 16위에 올랐었다. 도쿄올림픽을 분석해보면, 우리는 총, 칼, 활 3종목에 전체 메달의 절반, 금메달의 80%가 집중됐다. 반면 일본은 구기, 육상 등 16개의 다양한 종목에서 메달리스트를 배출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이 스포츠강국의 지위를 얻은 데에는 근원까지 파고들어 기초를 탄탄하게 확립하고, 끝까지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특유의 성향이 작동했다. 계기는 1996년에 왔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이어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도 금메달 3개에 그치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는 금메달 16개를 따내며 3위에 올랐던 일본이다. 일본은 1980년대 중반부터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한 클럽을 꾸려 스포츠 저변을 확대했는데, 그런 학교체육과 생활체육을 뜻하는 ‘부카츠’와 엘리트 체육을 연계하여 기초를 다지고, 당장 눈앞의 성적보다는 수십 년 뒤를 바라보는 장기 플랜을 추진키로 한 것이다. 일본의 집중적인 투자는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됐다.


일본은 2001년 국립스포츠과학센터(JISS), 2008년 국립훈련센터(NTC)를 각각 설립하여 현미경식 정밀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2011년 스포츠기본법을 제정하고 2015년 스포츠청을 설립해 해외 경기와 합숙 기회, 기술분석팀과 우수코치진 등을 제공하며 선수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024년 기준 스포츠청의 예산은 약 3330억 원이다. 그 결과 부카츠에서 발굴한 선수들은 엘리트 선수로 성장했고, 2016년 리우올림픽 육상 남자 400m 계주 은메달, 2024년 파리올림픽 여자 육상 트랙&필드 금메달과 브레이킹 금메달 등의 수확을 얻었다. 또한 일본축구협회(JFA)는 “2050년 일본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고 우승하겠다.”는 ‘재팬스 웨이(Japan’s Way)’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유소년 선수들을 연령대별로 나누어 육성하며 축구강국에 보내 선진축구를 배우도록 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FIFA랭킹은 15위, 우리는 23위다. 일본 농구도 2016년부터 남녀 대표팀에 유능한 외국인 감독을 선임해 체질을 개선하고 있는데, 지금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올림픽 분선 무대를 밟고 있다. 농구를 포함한 야구, 축구, 배구 등 4대 스포츠 남녀팀 모두 일본은 우리보다 랭킹이 높다.


파리올림픽이 끝나고, 안세영은 재팬 오픈과 코리아 오픈 등 큰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악화된 부상의 후유증이었다. 안세영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글에서 “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불합리하지만 관습적으로 해오던 것들을 조금 더 유연하게 바뀌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에 대한 것이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공방전이 아닌 제가 겪은 일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기를 내심 기대한다.”고 소망을 밝혔다. 안세영의 지극히 당연한 소망이 이루어졌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여전히 미안하다. 그리고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당당함이 고맙다. 이제는 우리도 그녀처럼 당당하게 우리의 할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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