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정책의 조건
공산주의는 폐기됐다. 역사의 유물이 됐다. 하지만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을 때 그 빛의 휘황찬란함은 눈이 멀 지경이었다. 그간의 모든 실패한 정치의 실패 요인을 제거하고, 꿈으로만 여겨졌던 정치의 모든 이상을 실현한 완벽한 정치 체제였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자들, 윤리와 도덕을 숭앙하는 자들, 그들이 뛰어들어 이끌었고, 따르는 자들은 손뼉 치고 환호했다.
공산주의는 우리가 갖는 혐오적 선입관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플라톤의 이상국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장 자크 루소의 이상사회, 그리고 프랑스혁명의 근본정신에 그 원류를 두고 있다. 모든 계급이 사라져 차별이 없고,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시는 부유하게 사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본성(本性)과 단절된 이성(理性)이 홀로 추구한 이상(理想)이었다. 이상은 이상일뿐 현실(現實)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이익을 우선하며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동기를 기반으로 행동한다.
모든 목동들이 차별 없이 원하는 만큼 소를 먹일 수 있는 목초지가 있다. 목동들은 자기 소유의 목초지는 제일 나중에 이용하기 위해 놔두고 모두 그 목초지로 몰려들었다. 목동들은 소들이 풀을 마구잡이로 뜯어먹고 마음껏 뛰놀게 했고 목초지는 곧 폐허가 됐다. 목동들은 자기 소유의 목초지로 돌아갔다.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다. 우리 정치와 행정이 국민의 세금을 ‘주인 없는 눈먼 돈’으로 여기고 마구 써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공범 두 명이 체포됐다. 범죄자들은 각각 독방에 수감되었다. 증거가 부족한 경찰은 자백을 받아 범죄를 입증하기로 하고 신문을 시작했다. 경찰은 두 명에게 동일한 제안을 했다. “누구든 먼저 자백을 하면 풀어주고, 안 하면 5년형을 받는다. 만약 둘 다 자백하면 둘 다 3년형을 받는다. 그러나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해 자백하지 않으면 둘 다 1년형이다.” 상대가 나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거나, 최소한 상대를 믿는다면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해서 모두 1년형인 최선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상대만 자백을 해서 풀려나고 나는 5년형을 받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결국 둘 다 자백을 하고 각각 3년형을 받는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다. 우리 정치와 행정이 “어차피 내가 안 써도 누군가는 가져다 쓸 텐데 먼저 쓰는 놈이 임자지.” 하면서, 국민의 세금을 마구 써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은 근원적 본성인 이기심을 계산에 넣지 않아 실패했다. 본성은 감각적 능력이고, 이성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다. 본성과 이성은 적당한 탄력이 있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본성은 자리를 지키려고 하고 이성은 더 나은 곳으로 끌고 가려하는데, 본성이 설득되면 이성을 따라간다. 그러나 본성이 움직이지 않는데 이성이 계속 끌고 가려하면 연결됐던 끈은 끊어져버린다. 설득되지 않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 본성은 이기심이다.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은 끈이 떨어진 풍선이 되어 저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린다.
개인에게 본성과 이성이 있다면, 사회에는 시장과 정부가 있다. 시장에는 시장논리가 있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공급과 수요가 있고, 그에 따라 균형이 유지되고 가격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균형이 깨지고 가격의 조작이 발생하는 것이다. 본성만 있는 야생에서는 공급과 수요의 질서가 유지된다. 사자가 연약한 영양을 잡아먹는 모습은 잔인하지만, 사냥은 배가 고플 때만 하고, 배가 부르면 하지 않는다. 사자에게는 계속 사냥을 하면서 먹고 남는 것들을 쌓아놓거나 다른 사자와 비교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배가 부르면 창고에 쌓기 시작한다. 처음엔 동으로 채우다가, 다음엔 은으로 채우고, 다시 금으로 채운다. 창고를 다 채우고 나서도 더 큰 부자를 보면 그를 이기기 위해 또 창고를 짓는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본성이 만족한 후에도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찾는다. 그 추구에는 끝이 없다. 여기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하얀 손과 검은손으로 분화된다. 본성이 시장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형성하는 하얀 손이라면, 이성은 균형을 깨뜨리고 가격을 조작하는, 시장을 왜곡하는 검은손이다.
그래서 정부가 필요하다. 보이는 손이다. 정부는 법을 만들고 원칙을 정해서 개입한다. 그것은 또한 정치이고 행정이며 정책이다. 그런데 보이는 손도 하얀 손과 검은손으로 나뉜다. 보이는 손의 주체도 결국 인간이다. 정부 실패, 정책 실패는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진보는 이상을 추구하고 그래서 현실을 바꾸려 한다.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목적성을 띤다. 우리 사회에, 인류 역사에, 반드시 필요하다. 정책은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눈을 하늘을 향하되 발은 땅을 딛고 있어야 한다. 땅에서 떨어지면 공중에 붕 뜬다. 떠있는 이상은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가는 풍선이다.
한 진보정권이 집값을 잡겠다고 나섰다. 당연한 일이고,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시장논리에 따르자면 누구나 욕심낼만한 입지에 좋은 집을 지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분양하면 된다. 공급이 늘면 가격은 내려갈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공급을 늘려봐야 또 돈 많은 다주택자들이 사들일 것이니, 다주택자들이 보유한 물량을 시장에 쏟아내도록 만들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토지 공개념’ 같은 진보의 정신에도 부합했다. 정부는 다주택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세금을 중과했다. 그러면서 신규 공급은 중단했다. 다주택자들은 버티기에 들어갔고 공급 중단으로 품귀 현상까지 벌어지면서 집값은 폭등했다. 본성과 이성을 연결한 끈이 팽팽해졌다.
그때라도 현실을 반영하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정권은 정책을 고수했다. 오히려 규제를 더 강화하고 세금도 더 늘렸다. 시장을 왜곡하는 못된 손을 이번에 아주 근절하겠다는 각오로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하지만 다주택자들은 집을 내놓지 않았고 집값은 역대 최고점을 찍었다. 본성과 이성을 연결한 끈은 탄력을 잃어 결국 끊어졌고 풍선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두 번의 보수정권이 지나가고 진보정권이 들어섰다. 다시 집값을 잡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이번에는 지난 실패를 교훈 삼아, 먼저 시장논리에 부합하는 양질의 신규 주택 공급 확대 정책으로 부동산 시장의 긴장을 이완시킨 후, 시장 상황에 따라 완급을 조정해 가며 다주택 현상 해소 정책을 추진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저 멀리 날아가 버렸던 풍선을 다시 찾아들고 나타났다. 10년 전 현실과 괴리된 이상적인 정책으로 처참한 실패를 주도했던 부동산 이론 전문가를 다시 중용한 것이다. 10년 전 정책이 틀렸던 게 아니고 강도가 약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다시 밀어붙였다.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번에는 지난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동원 가능한 모든 규제를 시장에 쏟아붓고 가능한 모든 종류의 세금의 최대치를 부과했다. 신규 공급은 완전히 끊어버렸다. 전면전이고 치킨게임이다. 정부는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으니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했다. 이번에는 숫제 집을 가지려는 욕구를 죄악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시장을 꺾지 못했다. 집값은 다시 폭등했다. 결국 본성을 이기지는 못한 것이다.
더욱이 그런 정책을 결정하고 밀어붙이던 고위직들이 주요 폭등 지역에 여러 채의 집을 가진 다주택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 신뢰와 정책 안정성 확보를 위해 실거주용 주택 한 채를 남겨두고 매각하라는 권고가 내려졌으나, 그들은 사임을 택했다. 진보정권이 안쓰러울 정도로 매달렸던 부동산 정책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가 됐다.
국민들에게 몽니라고 까지 불렸던 진보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약발이 듣지 않는 현실에, 규제에 규제를 추가하고, 거기에 또 규제를 추가하면서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시장에는 괴리와 왜곡이 쌓여갔고, 엄청난 뒤틀림은 다음 정권에서 임계점에 도달했다. 폭발은 유례없는 전국 단위의 전세 사기 사태로 나타났다. 원룸, 빌라 같은 주택 유형에 사기 범죄가 집중되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청년이나 서민들에게 돌아갔다. 본성을 거스르는 이성,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이상이 얼마나 허구인지, 그리고 얼마나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피해가 진보정권이 그토록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이들에게 집중됐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이러니하다.
본성은 분명 자리를 지키려 하고 이성은 그런 본성을 이끌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둘은 적당한 탄력이 있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탄성계수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성이 튀어나가더라도 용인되는 범위 내에서는 끈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서면 연결은 끊어지고 풍선은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시장에 대해서는 우선은 본성에 부합하도록 최대한 시장논리에 맡겨보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만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가만히 나둬야 할 데에는 쓸데없이 개입해서 긁어 부스럼 만들고, 개입해야 할 데에는 오히려 뒷짐 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먼저 유지해야 할 것과 바꾸려는 것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유지해야 할 것을 바꾸려 하고, 바꿔야 할 것을 유지하려 하면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정확히 구분한 뒤에는 바꿔야 할 것을 바꿔나가는 것이 맞는다. 다만 본성을 반드시 계산에 넣고, 현실에 발을 디딘 상태에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