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엉망으로 만드는 허울뿐인 이름
이제 와서 진보와 보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도 21세기 자유민주주의의 한복판, 세계 10위권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이념이 아닌 실질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상관없이,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고 했다. 1979년에 했던 말이다. 그리고 1985년엔 “부자가 될 능력이 있는 자들이 먼저 부자가 되어라. 그 후에 낙오된 자들을 도우라.”고 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대립이 극에 달했던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이 했던 말이다.
덩샤오핑은 국내외에서 이견 없이 오늘날 미국과 세계 1위를 다투는 초강대국 중국의 기틀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중국 공산당은 20세기 중국을 살려낸 거인이라는 의미의 백년소평(百年小平)으로 칭송하고 있고, 중국 언론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자로 칭한다. 그는 20세기 후반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진두지휘했으며 흑묘백묘론(黑貓白貓論), 선부론(先副論), 28자 방침(외교 전략) 등으로 대변되는 실용주의를 견지하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융합한 중국형 사회주의를 정립했다.
다 떠나서 진보가 진짜 진보이고 보수가 진짜 보수이긴 한 건가. 선거 때만 되면 좌클릭이니 우클릭이니 다투고 비난하면서도 표를 얻는데 도움이 될 거 같으면 안면몰수하고 슬그머니 공약집에 집어넣는다. 통상 보수는 지키려 하고 진보는 바꾸려 한다. 시대를 떠나 정파를 떠나, 좋은 것은 지키고 나쁜 것은 바꿔야 하는 것이지, 무조건 지켜야 하고 무조건 바꿔야 하는 건 더 이상 없다. 더욱이 우리 정치엔 ‘무조건’이라는 최소한의 기준이나 원칙도 없다. 그러면서 입만 열면 보수니 진보니 하고 있다. 실재는 없고 이름만 남아있다. 다만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위한 피아 식별용 깃발이고 국민들을 갈라치기 해서 표를 끌어 모으기 위한 정치공학의 수단일 뿐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건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하나 된 힘으로 실력(實力), 실용(實用), 실리(實利)를 추구해야한다.
이미 반세기 전 대표적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배척당했던 그 허울뿐인 이름이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경제 이야기다. 보수는 기업인들을 애국자로 치켜세운다. 기업의 사회 환원 운운하면서 기부를 해라, 재단을 만들어라 어르고 달래서 그물 하나에 몽땅 꿰어 놓았었다. 또한 세일즈 외교를 한답시고 수십 명씩 끌고 돌아다닌다. 군사독재 시대의 못된 버릇이 남아서 아직도 기업인들을 정치 앞에 줄 세우는 것이다. 1988년 5 공화국 청문회 때 한 기업인의 폭탄 발언이 나왔었다. “정부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시류에 따라 돈을 냈다. 1차는 날아갈 듯 내고 2차는 이치에 맞아서, 3차는 편하게 살려고 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요구하고 누군가는 거기에 응하고 있을 것이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또 보험용으로.
진보는 어떤가. 보수가 기업인들을 꿰어 놓은 그물을 걷어올려서는 그대로 일망타진이었다. 기업인들의 목에 부패한 자본주의의 표상, 정경유착의 원흉이라는 팻말을 걸어서 몽땅 감옥으로 보냈다. 절대로 기업인들이 잘했다는 거 아니다. 우리 정치가 문제라는 얘기다. 재벌의 불법적 지배구조, 불공정 독점행위 안 되고, 그걸 덮으려는 정경유착은 더 안 된다. 그럼 그런 부분들을 들어내고 수술해서 재발하지 않도록 하면 될 일이다. 근데 그게 아니다. 기업인들을 범죄자 취급하면서 이념 실현의 도구, 정파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정경유착의 원류가 보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진보가 정경유착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집권을 거듭하며 기득권화된 진보는 입으로만 진보를 외칠 뿐이지 하는 행동은 보수와 다를 게 없다. 진보 행세를 해야 하니 앞에서는 기업인들을 적대시하면서, 뒤에서 그들에게 손을 벌린다.
정치가 기업에게 해줘야 할 일은, 전략분야 R&D에 집중해서 첨단기술, 첨단산업의 방향 제시해 주고, 교육정책 잘 추진해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분야별로 충분하게 양성해 주고, 송전선, 용수로, 도로 빨리 깔아주고, 그리고 해외 시장 개척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무대에서 싸우기도 바쁜 기업인들 데려다 놓고 보수, 진보 오가면서 온탕, 냉탕 번갈아가며 괴롭히고 있다. 미래지향적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실질은 없고 허울뿐인 이념의 양극단을 오가는 정책으로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기업들 경영 위축시키고 수없이 문 닫게 만들어서 멀쩡한 일자리 다 날려버렸다. 그러면서 입만 열면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기업인들은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제발 정치만 없으면 살 것 같은데”
다음은 외교 이야기다. ‘외교는 의리가 아니다’, ‘외교는 경쟁력이다’에서 썼듯이, 외교는 계산이다. 그리고 내 나라, 내 백성을 위해 싸워 이겨야 하는 전쟁이다. 오로지 실용, 실리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또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서 명분뿐인 헛발질 외교를 하고 있다. 정파에 따라 공들이는 나라가 바뀌고, 추진하는 정책이 바뀐다. 양극단을 오고 가면서 그간 들인 공도, 추진한 정책도 모두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어버린다. 제로가 아니라 한참 마이너스다.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그나마 기업들이 힘들게 뚫어놓은 시장마저 다 닫혀버린다.
우리가 혈맹이라고, 우방이라고 찾아가고 고개 숙이고 하는 나라들마저도 우리에게 부풀린 계산서를 내밀고 있다. 우리가 절대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은혜적 사건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 정치는 그렇게 명분, 의리만 따지고 있는 것인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거 없이 내 나라, 내 백성은 사지로 내몰면서. 도움받은 거 잊자는 얘기 아니다. 동맹국에 대한 의리,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 같은 것들 무시하자는 거 아니다. 영리하게 실용적인 외교를 하고, 내 나라 내 백성을 최우선하고, 적어도 이용당하고 뒤통수 맞고 다니지는 말자는 얘기다. 그런데 아무리 뜯어봐도 진정한 명분, 의리가 아니다. 역시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만 권력을 지키고 연장하기 위한, 정파의 이익을 담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다음은 대북정책이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극온탕과 극냉탕을 오가고 있다. 반복해서 얘기하듯이 그것이 반드시 지켜지는 원칙도 아니다. 진보도 필요하면 적대시하고 보수도 필요하면 북한과 손잡고 북풍공작을 기획한다. 역시 정파의 이익을 구하고, 국민을 갈라치기 위한 수단일 뿐 같은 민족에 대한 인도주의, 자유주의 수호와 같은 거창한 명분은 모두 허울이다. 그 사이에서 수십, 수백조 원의 국민 세금이 종잇조각이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또한 끓었다 식었다 양극단을 오가는 한반도 정세로 인해 극심해진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그 여파로 인한 유무형의 피해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연장을 위해 줬다 뺏었다 하는 장난 같은 정책들, 그로 인해 발생한 안보위기로 피해를 입은 국민들, 장병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잃어버린 그들의 생명과 재산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주인 없는 눈먼 돈인 국민 세금으로 보상해 주고 애국가 불러주고, 그러면 되는 것인가.
지금에 와서 통일은 너무 먼 얘기가 아닌지,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통일의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는 건 안 된다. 가능하면 통일을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어쩌면 민족도 철 지난 이념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북한에 가족, 친지를 가진 우리 국민들이 있다. 또한 남과 북이 힘을 합쳐서 뭐든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려놓고 싶지 않다. 꼭 민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실리적으로 말이다. 남북 분리 없는 한반도에서 1억 명 정도의 국민들이 살면서, 자연자원과 인력자원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 경쟁력은 누구도 쉽게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분단은 국제 정세와 강대국들의 이기주의에서 기인한바 크다. 왜 우리가 좋은 기회를 포기해 가며 고스란히 불이익을 감내하고 있어야 하는가. 누구 좋으라고.
철 지난 이념의 망령이 어슬렁거리는 곳이 경제, 외교, 대북정책뿐이겠는가. 대한민국. 유일한 분단국가다. 한반도에 수천 년을 모여 살던 유일한 단일 민족의 분열, 그 근원적 분열이 마치 우리의 유전자에 DNA처럼 새겨져버리기라도 한 듯,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지역으로, 연령으로, 성별로 단세포 동물 아메바처럼 계속 분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우리 정치의 문제다.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권력 획득에 혈안이 된 정치의 농간이자 편 가르기다. 그렇지 않은가. 남북의 분열이야 우리로서는 불가항력적이었다. 그래서 다시 합치자고 하는 것 아닌가. 그건 그렇고, 한번 생각해 보자. 정파, 지역, 연령, 성별 등이 다르면 원래 다 싸워야 하는 건가.
‘리콴유’에서 리콴유가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으로, 불교, 이슬람, 기독교로 민족·종교·언어로 파편화된 국민들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었는지 썼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가 인종과 계층과 정파로 나뉜 국민들을 단합시키고, 그 힘을 토대로 연합국 진영을 단합시켜서 어떻게 지구적 분열을 봉합했는지 썼다. 그리고 ‘앙겔라 도로테아 메르켈’에서 메르켈이 어떻게 수백 개 제후국의 전통과 동서독 분열의 아픔을 간직한 독일을 하나로 만들고, 다시 유럽을 똘똘 뭉치게 했는지 썼다.
한반도에는 원나라와 30년을 싸우며 끝내 복속되지 않은 유일한 민족이 있었고, 왕과 양반과 관군이 도망가버린 폐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며 나라를 지켜낸 의병들이 있었고, 저 리콴유의 평가대로, “모든 피식민지 국가들이 식민주의에 순응할 때 민족적 자긍심으로 절대 굴복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온 나라가 하나가 되어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고, 그 나라가 부도의 위기에 처하자 다시 하나가 되어 금을 모아 살려냈다. 이제는 진보와 보수, 그 허울뿐인 이름, 분열의 정치를 끝내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 기반한 실용의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정치를 바꿀 유일한 길은 우리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