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명분론, 내부 가스라이팅, 외부 정신승리
1. 한반도를 지배한 이념은 실용이었다.
한반도에서 실용이 사라지고 명분이 득세하기 시작한 게 언제쯤일까. 이방원에 의한 정도전의 죽음 이후부터다.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만주를 장악하고 중원까지 위협했었다. 군사력은 실용이다. 백제는 활발한 해상 교역을 바탕으로 문화와 예술을 꽃피었다. 교역도 역시 실용이다. 신라는 당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했다. 외세를 이용했고 그 때문에 고구려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려서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민족 개념이 없었다는 옹호론이 있다. 인접한 적국을 물리치기 위해 멀리 있는 강한 나라의 힘을 빌린 실리 외교 자체는 실용이다. 내제외왕(內帝外王) 체제를 채택한 고려도 실용의 나라였다. 외세는 군사력으로 물리치기도 했고 실리 외교로 협상하기도 했다. 벽란도를 중심으로 하는 해상 무역 활발했고 남녀의 차별이 없었으며 호국적이고 현세 중심적인 불교가 융성했다.
2. 한반도에 명분론이 도래하다.
2-1. 절대적 명분론인 성리학의 유입
그런데 고려 말 안향이 성리학을 한반도에 들여오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는 성리학에 기반한 절대적 명분론인데, 형이상학적인 천리(天理)와 이기론(理氣論)의 체계 안에서 군주를 천명(天命)을 받은 자의 지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절대성을 부여했다. 유럽 절대왕정의 신성왕권(神聖王權)과 같은 개념이다. 하늘의 이치를 실천하는 군주가 가지는 명분은 단순한 사회적 질서가 아닌 우주적 이치로 격상된다. 하늘의 대리자인 군주의 지위는 확고하고, 거기서 비롯된 군신관계의 공고성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다른 모든 관계들을 규정했고, 일상을 지배했다.
2-2. 극한의 명분론이 쒸운 영원한 신분의 굴레
주자 성리학의 뿌리는 공자다. 공자는 인의, 예, 덕치를 강조했고, 이를 통한 사회 질서와 위계 유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즉 각자의 신분에 맞는 역할의 수행을 또한 강조했다. 이것이 공자의 형식적 명분론이다. 주자가 이걸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확장시켜 성리학적 명분론을 탄생시켰다. 명분이 시작되는 지점을 하늘로 끌어올려 절대불가침의 극한적 명분론을 완성한 것이다. 한번 주어진 신분과 역할은 자신은 물론 후손까지 대대손손 옥죄고 구속하는 영원한 굴레가 된다.
2-3. 극단적 명분론의 가스라이팅과 정신승리
하늘과 땅, 왕과 신하, 남자와 여자, 양반과 상민에서 천민까지, 적자와 서자에서 얼자까지, 세상을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또 나눈다. 질서에서 시작된 명분이 차별이 됐지만 피지배층은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다. 또한 다들 그것이 순리라고 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갔기 때문이다. 지배층에게 성리학적 명분론은 다시없을 치트키다. 한번 지배층은 영원히 지배층이고, 그 질서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 하늘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늘과 조선 사이에는 명(明)이 있고, 천자가 있다. 중화(中華)가 있고 소중화(小中華)가 있다. 중화가 올라갈수록 소중화도 더불어 함께 올라가니, 더 엎드리고 더 받들어 섬겼다. 나머지는 모두 야만이고 오랑캐다. 실용이 철저하게 배제된 극단적 명분론으로 나라 안의 사회 질서와 나라 밖의 국제 질서를 확립한 것이다. 그 질서에 동의하는 나라는 조선과 명뿐이었고, 그중에서도 지배층에만 해당된다. 정신승리이고 가스라이팅이다.
3. 극단적 명분론이 한반도를 지배하다.
3-1. 이상적 명분론에 따른 괴리와 왜곡
조선의 정치,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일어났던 모든 부조리의 근원이 바로 저 성리학적 명분론이다. 모든 실용을 말살시켜 버린 극한의 명분론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전제하고 싶다. 위아래를 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거 중요하다. 전 근대 신분제 사회였기에 명분도 중요했다. 체제 유지를 위해 중요하다 못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공자의 형식적 명분론만 됐더라도 나쁘진 않았을 것인데, 주자의 성리학적 명분론, 절대적인 극한의 명분론으로 가면서 문제가 됐던 것이다. 추구한 가치는 틀리지 않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이다 보니 괴리와 왜곡이 일어났다.
3-2. 대기근 한복판에서의 학술 논쟁
대표적으로 두 차례의 예송논쟁이 있다. 모두 장렬왕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규례에 대한 논쟁으로, 1차(기해예송, 1659년)는 아들인 효종의 상례에서였고 2차(갑인예송, 1674년)는 며느리 인선왕후 상례에서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의 피해가 채 복구되지도 않아 백성들은 질병과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데, 왕실에서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에 논쟁을 벌이는데 온 국력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두 예송 사이에는 경신대기근(1670~1671)이 있었다. 아사자 및 병사자가 전국적으로 100만 명에 달했고 한성부를 비롯한 전국의 행정이 마비되기도 했는데, 조정은 고작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3-3. 명분론 외교참사로 자초한 외침
다음은 인조 대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야기한 외교 대참사다. 처음에 청(淸)의 태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힘을 키워서 나라를 세우기 전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족이다. 청의 목표는 중원이었고, 배후에 명과 가깝게 지내는 조선이 있다는 게 꺼림칙했을 뿐이었다. 적당히 소통하면서 배후를 치지 않는다는 확신만 주면 됐을 것을, 망해가는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지키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외교는 의리가 아니다’에서 썼듯이 명의 도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참전했다는 사실, 그러다 보니 휴전 협정을 핑계로 종전을 한없이 지연시켰고, 그 과정에서 우리 백성들의 고통과 국토의 황폐화를 초래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3-4. 청과는 화약을 맺고 명에게는 뒤통수를 맞다.
급기야 나름 실리 외교를 펼치며 아슬아슬하게 나라와 백성을 지켰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실각하자 다음은 파국이었다.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세력이었다. 또 그 잘 난 명분이다. 청(후금)과의 외교문서 교환을 끊어버렸고, 요동 수복을 꾀하던 명군의 주둔지를 평안도에 내주며 대놓고 친명배금(親明拜金) 의지를 드러냈다. 결국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발발했고, 조선은 청과 형제국이 되는 화약을 맺어야 했다. 평안도에 주둔했던 명군 장수 모문룡은 자신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고, 화약 후 철수하던 청이 석방한 조선 포로들을 공격해 참수하고는 “오랑캐의 대군에게 승리했다.”며 명 조정에 허위 보고를 했다. 그토록 부르짖던 조선과 명 사이 의리의 실체였다.
3-5. 백성들만 죽음으로 내몬 비현실적 명분론
재조지은은 망국 직전에 기사회생한 선조, 뜻밖의 용상을 차지한 인조, 그리고 거기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지배층의 이념이지 백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그거 지키겠다고 나가서 싸우다 죽고, 질병과 배고픔으로 죽고, 포로로 잡혀가서 죽는 건 백성들이다. 병자호란 후에도 조선 조정의 대명의리(對明義理)는 꺾이지 않았고 결국 청 황제 홍타이지의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이, 모든 다른 나라 사신들이 보는 앞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배례를 거부하면서 홍타이지의 격노를 유발했다. 결국 인조 14년(1637)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명은 중화, 조선은 소중화이고, 천자는 오직 명 황제뿐이라는 명분론이 또 애먼 백성들만 전화(戰禍)로 내몬 것이다.
3-6. 문 중시, 무 천시 명분론의 끝 임진왜란
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도 따지고 보면 그 기저에 명분론이 있다. 왜는 섬나라의 오랑캐였다. 감히 소중화에 대한 침략은 꿈도 꿀 수 없는 하찮은 존재였다. 왜가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들여오고 100년간 이어지던 전국시대를 끝내서 통일된 군사력의 정점을 찍던 상황에서도 조선에게 왜는 여전히 오랑캐일 뿐이었다. 상대를 무시하려면 그만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문(文)과 무(武)를 나누었고 무를 천시했다. 개국 이후 200여 년간 평화가 이어지며 태조에서 태종을 거쳐 세종 대에 대마도를 정벌했던 무를 중시하던 기풍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더욱이 중종 대 조광조를 시작으로 조정에 진출했던 사림파가 훈구파를 밀어내고 세를 확장하면서 문 중심의 성리학적 명분론은 정치를 넘어 조선 사회 전체를 잠식했다.
3-7. 상공업, 앞에선 천시, 뒤로는 뇌물
명분론은 사농공상(士農工商)도 나누었다. 상공업은 천시됐다. 왜와 청은 서양과 교역하고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발전시켰고, 그 힘으로 국부를 창출하고 군사력을 증강했지만, 조선은 쇄국했고 상공업은 내수에 꽁꽁 묶어 놨다. 필요 최소한만큼만 생산하고 유통했다. 하지만 조선의 명분론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허울뿐인지. 상업을 천시하며 억눌렀지만 재물을 마다할 자는 없다. 장사꾼이 이문을 탐하는 것을 혐오하며 사서삼경이나 읽던 군자들은 뒤로 장사꾼들의 돈을 받아 챙겼다. 한양의 어용상점인 육의전, 관납 등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경시서, 선혜청, 호조의 요직, 공무역과 사무역의 거점이었던 평양의 감사 자리가 인기를 끌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들은 뒤로 몰래 실용을 챙기면서 피지배층에게는 명분을 강요하는 조선 지배층의 이율배반이다.
3-8. 임진왜란 직전, 동인 1천여 명 희생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감당하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삼정으로 겨우 유지되는 나라에서, 매관매직과 착복으로 일군 재물을 가지고 지배층이 하는 일이라고는 예송과 같은 학술 논쟁 아니면 권력 획득을 위해 죽고 죽이는 정쟁뿐이었다. 피지배층의 피와 땀으로 축적한 에너지를 내적 발전이나 외세 방어를 위해 사용하기는커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짓거리로 다 날려버리고 허송세월한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에는 ‘정여립의 난’이 있었고, 그를 명분으로 선조가 기획하고 서인 위관 정철이 감독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당시 열세였던 서인의 총공세에 3년여 동안 동인 천여 명이 희생됐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결성해 관군이 막지 못한 남해안의 왜구를 토벌한 적은 있으나 반란을 획책했는지는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와 주고받은 서찰만 발견돼도 목숨을 내놔야 했다. 임진왜란 목전에서 함께 힘을 모아 국란을 극복해야 할 지도층의 최소 반 이상을 몰살시킨 것이다.
3-9. 정묘호란 직전 북방 수호 병력, 군비 손실
정묘호란 3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인조반정 후 집권세력은 기찰을 강화했다. 또 다른 반정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공포 정치에 대한 호응으로 실체와 풍문이 뒤섞인 고변들이 쏟아졌고 거기에 평안병사 이괄이 걸려들었다. 반정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조사 결과 무고임이 밝혀졌음에도, 이괄이 안 되면 그의 아들이라도 압송해서 국문해야 한다는 요구를 접지 않았던 조정은 평안도 영변 군중으로 기어이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파견했고, 결국 이괄은 이들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 북방을 지키던 정예 1만 명이었다. 인조가 공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우여곡절 끝에 난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아군끼리 반란군과 진압군으로 나뉘어 싸우느라 외적을 막아야 할 병력과 군비를 한입에 다 털어먹고 만 것이다.
4. 명분론으로 망국에 직면하고, 명맥을 유지하다.
4-1. 연이은 망국의 위기 후에도 다시 명분론
그렇게 조선은 더 이상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자생력과 방위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양란을 맞닥뜨렸다. 한 번은 열도 전체가 총집결하여 부산에서 한양까지 보름 만에 주파한 왜의 압도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같은 불세출의 성웅과 류성룡과 같은 현명한 충신, 그리고 전국적 의병 활동으로 간신히 나라를 지켰고, 또 한 번은 망해가는 명을 향한 의리는 붙잡고 융기하는 청은 배척하는 명분론을 고집하며 사실상 스스로 망국을 선택했지만, 당시 동북아 정세와 청의 알 수 없는 결정으로 다시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명분을 내세워 아군을 죽이고, 명분에 빠져 백성을 사지로 내모는 조선 지배층이 정신을 차린 적은 없었다. 임진왜란 중에는 의병장 김덕룡을 죽이고, 이순신을 고문하고 백의종군시켰으며, 류성룡을 내쫓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며 충청도 화양동에 만동묘를 만들고 창덕궁에 대보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4-2.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이은 왕조의 명맥
조선은 진작 패망했어야 했다.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여서, 우리 역사학계도 조선이 그 숱한 고비들을 넘기며 명맥을 유지한 것을 불가사의로 여긴다. 그러나 외세의 공격으로부터 한편으로는 의인들의 희생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운 좋게 살아남은 조선이 내부로부터의 역성혁명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의 그 성리학적 명분론 때문이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절대성을 지닌 군주의 불가침성, 그 군주에서 시작되어 사회 전반을 장악한 질서 덕분이었다. 여기저기서 반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정감록 같은 예언서들이 돌면서 역성혁명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씨 왕조의 지배 체제를 전복할 만큼의 에너지가 축적될 수 없었다. 성리학적 명분론 때문이다.
5. 실용적 명분론, 통치 이념이 될 기회를 잃다.
5-1. 고려 말 정도전, 실용적 명분론으로 역성혁명을 주창하다.
앞서 이방원에 의한 정도전의 죽음 이후 한반도에서 실용이 사라지고 명분이 득세했다고 썼다. 삼봉 정도전과 포은 정몽주는 동문수학하던 벗이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부패와 횡포는 극에 달했다. 산과 강을 자신이 소유한 토지의 경계로 삼을 만큼 부를 독점했고 백성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유민이 되어 산천을 떠돌았다. 부를 독점한 극소수의 세력은 그대로 정치 권력도 독점했고 하인을 보내 같은 귀족에게 몽둥이질을 하고 토지를 빼앗을 만큼 지배층 내부의 질서도 엉망이었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고려 말의 석학이자 문하시중을 지낸 목은 이색 밑에서 유학을 공부하며 함께 변혁을 꿈꿨지만 둘은 분화했다. 정몽주는 공자에 뿌리를 둔 주자의 성리학적 명분론을 추구하며 왕씨 왕조 내에서의 개혁을 추진한 반면 정도전은 맹자의 실용적 명분론을 선택했고 역성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권문세족 이인임에 의해 유배형을 받고 나주로 떠나는 정도전에게 <맹자>를 건넨 이는 정몽주였다.
5-2. 조선 초 이방원, 정도전을 베어 실용적 명분론을 죽이다.
이방원은 절개를 꺾지 않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였고, 이 일로 인해 정도전과도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조선 개국 후에는 제일 공신이면서도 정몽주를 죽인 일로 인해 세자 자리를 놓치고 가병까지 빼앗기며 배척당했다. 불만과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배척의 중심에 있던 정도전을 송현방에서 죽인다. 그러면서 조선의 첫 번째 백성이자, <조선경국전>을 써서 국가체계를 정립하고, 한양을 설계했던 정도전을 조선의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다. 또한 세습되기 때문에 인품과 역량을 담보할 수 없는 왕은 인사권과 승인권만 가지고, 정치는 훈련과 검증을 거친 재상에게 맡겨야 한다는 정도전의 실용주의적 정치 철학이 집대성된 <재상중심정치>도 함께 폐기됐다. 그리고 이방원은 정도전을 파내버린 그 자리에 절개의 화신 정몽주를 새겨 넣었다. 그렇게 정도전의 실용적 명분론은 한반도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정몽주의 성리학적 명분론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 했던, 조선 개국과 함께 낙향해 은거했던 고려의 온건파 신진사대부들은 사림파가 되어 조선 조정을 장악했고 성리학적 명분론은 조선 전체를 장악했던 것이다.
5-3. 성리학적 명분론, 태평성대의 통치 이념이 될 기회를 잃다.
성리학적 명분론이 추구하는 가치 자체는 옳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이기 때문에 괴리와 왜곡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추구하고 실천한 이들도 분명 있었다. 세종이 그랬고, 영조와 정조가 그랬으며, 한때의 광해군이 그랬다.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들을 공납의 지옥에서 건져낸 김육이 있었고, 병자호란 사이로 홀로 길을 열었던 최명길이 있었으며, 실학자 박지원과 정약용이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막아낸 이순신과 류성룡도 있었다. 한편 조선에 너무도 필요했던, 그러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사그라졌던 두 인물이 있다. 그들의 죽음과 함께 조선은 바뀔 기회, 즉 성리학적 명분론이 지배층의 영구적 지배를 위한 정신승리이자 가스라이팅이 아니라, 부강한 나라 행복한 백성을 만들어 태평성대를 이룰 통치 이념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5-4. 소현세자의 실용주의, 명분론에 밀려 사그라지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후 청에 끌려가 8년을 인질로 살았다. 1612년(광해군 4년)에 태어나 대북파에 휘둘리고 무리하게 궁궐을 지으며 혼군이 되어가는 광해군을 목도했고, 12세에 아버지의 반정을, 13세에 이괄의 난을 겪었고, 이후 세자의 신분으로 16세에 정묘호란, 25세에 병자호란을 경험했다. 특히 16세 때는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 대신 분조를 이끌면서, 전란 중이니 백성에게 세금을 함부로 걷지 말고 쇠고기나 우유를 진상하지 말 것, 비 오는 날 자신이 말을 타고 가는 길에 볏짚을 깔지 말고 아껴서 군마를 먹일 것을 지시한 어리지만 명민한 세자였다. 청의 심양에서 소현세자는 실용을 만났다. 꺼져가는 중화 명을 밀어내며 중원을 차지하는 오랑캐 청을 지켜봤고, 서양의 최첨단 문명을 경험했다. 현명한 세자빈 강씨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면서 재물을 모았고, 그 힘으로 청에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을 구원했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성리학적 명분론은 어땠을까. 또한 인조의 눈에 비친 소현세자는 어땠을까. 청에서 풀려나 9년 만에 귀국한 지 석 달도 못되어 소현세자는 사망한다. 석연찮은 이유였고 34세였다. 이후 세자빈 강씨는 역적으로 몰려 죽고 세 아들 중 둘은 제주도 유배 중 돌림병으로 죽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유배지를 전전하다 요절했다. 만약 소현세자가 살아서 인조의 뒤를 이었다면 어땠을까.
5-5. 효명세자의 실용주의 안타깝게 사그라지다.
효명세자는 정조의 손자다. 생김새도 그 현철함과 강단 있는 기질도 정조를 쏙 빼닮았었다고 전해진다. 1809년(순조 9년), 150년 만에 중전의 몸에서 태어난 순조의 외아들로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세 살이 되던 1812년에 세자로 책봉됐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순조를 대신해 1827년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했는데, 18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순조의 잦은 병환으로 해이해진 조정의 기강부터 다잡았다. 또한 발호를 시작하던 세도정치에 맞서 궁중무용 창작, 동궐도 제작 등을 추진하여 아버지 순조와 왕실의 권위를 드높였다. 문예부흥 군주 정조의 손자다운 면모를 드러내며 그렇게 조선에 희망을 드리운 것도 잠시, 효명세자는 1830년 21살의 나이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요절하고 만다. 조선의 마지막 빛은 그렇게 사그라졌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은 정조가 아들 순조를 보필하라고 발탁한 순조의 장인이었다. 이후는 21살에 요절한 헌종, 강화도령 철종,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다. 효명세자가 왕위를 이었다면 어땠을까.
6. 명분론, 상공업 천시로 첨단기술을 왜에 넘기다.
6-1. 왜에 넘긴 최첨단 하이테크 연은분리법
성리학적 명분론은 상공업분야에서도 뼈아픈 실책을 남겼다. 조선은 16세기 초 연산군 대에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을 고안했다. 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해 은만 골라내는 기술로 당대 개발된 은 제련법 중에서 가장 획기적이었다. 하지만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연산군 때의 사치풍조 척결, 명나라로의 은 유출 우려 등을 이유로 은광 채굴을 중단시켰다. 은광 개발 기술자들은 왜로 건너갔고 당대의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은 왜로 유출됐다. 왜는 연은분리법을 활용해 이와미 은광을 크게 성공시킨 후 다른 은광들로 확산시켰고, 이후 연쇄적으로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한 교역 활성화, 은본위제 확립 등이 이뤄졌다. 16세기말 당대의 기축통화였던 은을 축적하면서 왜는 전국을 통일하고 유럽의 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 힘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근대화까지 달성했던 것이다. 조선이 상공업의 중요성을 인지했다면 어땠을까.
6-2. 왜에 넘긴 최첨단 하이테크 도자기 기술
왜는 17세기부터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며 근대화 추진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왜의 도자기 기술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의 수많은 도공들을 통해 전래됐다. 특히 ‘도자기의 신’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삼평이 유명하다. 그는 아리타 동부 이즈미야마에서 자기의 태토(胎土)가 되는 양질의 자석광을 발견하고 왜 최초로 백자를 생산했다. 이후 아리타 지역은 왜의 대표적 도자기 생산지가 되었고, 조선 도공들의 첨단기술에 명의 도자 양식, 왜의 전통 회화나 공예가 더해지면 독자적 브랜드가 탄생했다. 165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한 첫 유럽 수출 이후 주문량은 폭발했고 왜의 아리타 도자기는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왜가 조선의 첨단기술 도자기 산업을 일으키고 유럽과의 교역을 늘리고 있던 시기에, 우리는 망해가는 명에게 의리를 지키다가 병자호란을 맞고, 조선에 실용주의를 들여오려던 소현세자를 죽이고, 왕실에서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결국 연은분리법을 유출해 왜가 경제력과 군사력을 증강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고, 그로 인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이후 다시 도자기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되어 은과 함께 일본 근대화의 발판이 된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