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6일, 나는 아내와 함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에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출발해서, 걷고, 걷고, 계속 걷고 있었다. 걷기 시작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몸은 쉬고 싶어 했다.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며, 그저 쉬고 싶을 때, 멀리서 마을(산솔, Sansol)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산솔에 있는 어디 카페에라도 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는 계속 걸어야만 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한 걸음 내딛고 나아갈 때마다 마을은 점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만큼 더 힘도 들었다. 종종 길의 좌우를 살펴보니,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막 가을 수확을 마친 후였는지, 넓게 펼쳐진 밭은 황량했고, 뭔가 모를 고요함도 느껴졌다. 정말이지, 그 넓은 밭에 무엇을 심었던 것인지를 전혀 추측할 수도 없을 만큼, 밭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http://www.photofvg.it/info.image.asp?cod=FVG012501.jpg)
그 황량함 속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사이에 듬성듬성 심겨 있던, 꽤 키가 컸던 이름 모를 나무들뿐이었다. 아내도 ‘이 구간은 참 재미없는 길이네’라고 생각하며 걸었다고 한다. 이러한 길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그저 여느 날과 같이,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른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는 인사를 주고받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나이가 지긋한 순례자 한 분이 황량한 밭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대뜸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다.

우리는 이 할머니 순례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봐도 황량했다. 돼지들이라곤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왜 우리에게 돼지고기를 먹어본 적 있느냐고 묻는 것인가? 아마도 일반적인 돼지고기가 아니라 스페인 이베리코 흑돼지를 먹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한 질문인가? 스페인이 이베리코 흑돼지로 유명하다고 하던데, 이 근처에 이베리코 돼지를 키우는 데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돼지를 키워본 적 있는지, 즉 소유해본 적이 있는지 묻는 것인가? 우리는 스페인 이베리코 흑돼지를 먹어보지 못했고, 돼지를 키워본 적도 없기에 “아니요(NO)”라고 답했다.
우리의 대답을 듣고서, 이 할머니 순례자는 피그가 엄청 맛있다고, 여기에 피그가 많다고 말했다. 나는 점점 혼란스러웠다. 이 할머니 순례자가 이상한 사람은 아닌가 생각했다. 혹시 스페인 이베리코 흑돼지와 관련해서 사업을 하시는 분이신가? 스페인 돼지고기에 대한 자부심이 많으셔서, 우리에게 스페인 돼지고기 소비 촉진을 위해 홍보를 하시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그 할머니 순례자에게 피그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이 근처에 유명한 돼지고기 농장이 있는지, 혹시 유명한 식당이라도 있는 것인지를 묻고자 하는 요량이었다. 그랬더니 이 할머니 순례자는 이렇게 답했다.
“나무들(Trees)!!!”

나무들.
나무, 내가 아는 그 나무.
땅에 뿌리를 내리고 푸른 잎으로 뒤덮인 그 나무를 말하는 것인가?
그럼 나무에서 돼지가 나온다고?
나무 근처에 돼지가 있다고?
나무와 돼지? 무슨 관계지?
이런 이상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가 ‘트리스(Trees)’라는 말이 지명이나 식당 이름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나무와 돼지의 관계에 대한 혼란스러움에 당황하고 있던 찰나에, 그 할머니 순례자는 길 가에 심긴 나무들이 있던 언덕으로 폴짝 뛰어 올라가시더니, 얼마 안 지나 씩 웃으며 조그마한 무화과 두 개를 아내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기브 잇 투 유어 프렌드, 잇츠 리얼리 나이스(Give it to your friend, it’s really nice)!”
아! 그제야 우리는 무릎을 쳤다. 무화과를 영어로 피그라고 부르는구나. 부족한 영어와 외국어 실력에 부끄러움이 밀려오면서, 아직도 영어로 의사소통하기에 한참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 할머니 순례자가 스페인어나 다른 언어를 영어와 섞어서 표현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피그(무화과)가 영어인지,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궁금했다.
저녁에 도착한 숙소에서, 와이파이가 연결되자마자 우리는 피그(무화과)에 대해서 검색했다. 그리고 무화과를 영어로 ‘fig’라고 표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무화과의 영어식 표기가 ‘pig’라고 생각했었다. 그 할머니 순례자가 처음 우리에게 했던 질문, 그 질문을 우리는 완전히 오해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할머니 순례자는 우리에게 “Have you ever had pigs?”(너희 돼지 먹어본 적 있니?)라고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그 순례자의 질문은 “Have you ever had figs?”(너희 무화과 먹어본 적 있니?) 였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영어 실력에 좌절했다.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답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더 큰 부끄러움과 민망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면서 이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는 한국식 영어교육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영어를 듣기와 말하기가 아니라 쓰기와 읽기 중심으로 배웠고, 써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어로 통해 의사소통할 때, 구분하기 어려운 발음이 ‘F’와 ‘P’ 아닌가. 우리의 한국어로는 이 두 알파벳의 소리를 ‘ㅍ’으로 동일하게 표기하지 않냐. 그래서 영어 공부를 할 때, 영어 선생님들이 그 차이를 강조하지 않냐."
지금 생각해보니, 질문 자체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돼지고기를 먹어 본 적이 있으니 ‘네(Yes)’라고 답을 했어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돼지고기를 먹어 본 적이 있느냐는 생전 처음 듣는 질문에 당황하다가 “아니요(NO)”라고 답을 한 것은 참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달콤한 스페인의 무화과를 먹어볼 수 있었고, 그 달콤함을 기억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에 달린 돼지들은 없었다.
나무에 달린 무화과들만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