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우리 부부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에 도착했다. 9월 16일에 프랑스의 생장 피에드포르 (St Jean Pied de Port)를 출발하여,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한 루트인 프랑스 길 (The French Way)을 ‘완주’ 한 것이다.
하지만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예상했던 것만큼 기쁘지도, 만족스럽지도, 감격스럽지도 않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대성당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고,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주제로 다룬 많은 글을 읽고 영상을 보아 오면서, 그런 순간을 기대했었는데, 도통 그런 기쁨과 감격이 우리에게는 밀려오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성실한 순례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하루에 평균 15KM 내외를 걸었고, 하루에 4KM만 걸은 적도 있다. 우리는 하룻밤 묵어갈 적당한 순례자 숙소(알베르게)가 없는 경로에서, 어쩔 수 없이, 정말 부득이하게, 딱 하루, 20KM 이상 걸었다. 또, 우리는 기차를 타고 상당히 긴 구간을 점프했고, 버스와 택시를 타고 험난한 코스를 걷지 않고 통과했다. 발에는 물집이 거의 잡힌 적이 없고, 조금이라도 건강에 무리가 느껴진다 싶으면,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순례자 숙소의 체크아웃 마감시간인 오전 8시나 9시까지 숙소에서 뒹굴뒹굴하며 머물렀다. 그렇게 숙소를 나와서도 우리는 걷지 않았다. 우리는 가까운 카페를 찾아 한 시간 정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나서야, 오늘의 순례 일정을 시작했다. 이렇게 9시나 10시쯤 마을을 떠나 오늘의 순례를 시작한 우리는 밤늦게 순례자 숙소에 도착한 적도 없다. 웬만하면, 우리는 4시나 5시쯤까지만 걸었다. 우리는 하루에 약 6시간 정도만 길 위에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프랑스 길(생장 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길이는 약 800KM, 많은 순례자들은 한 달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고 완주한다. 이 길을 기차, 버스, 택시 등의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완주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평균 25KM는 꾸준하게 걸어야 한다. 1시간에 4KM를 걷는다고 해도 6시간 이상은 걸어야 하고, 짊어진 배낭과 길의 경사도와 난이도 등을 고려하면, 1시간에 4KM를 걷는 것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요즘 젊은것들은 고생을 몰라”
“요즘 젊은것들은 고생을 안 하려 해”
“젊어서 고생 좀 해봐야 돼”
“No pain, No gain”

이 말들은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유난히 힘들게 했다.
다른 순례자들이 새벽부터 길을 나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느껴보려 노력하며 의자에 앉아 있을 때마다...
기차, 버스, 택시를 타고 험난한 길을 ‘점프’할 때마다...
‘점프’ 한 번하지 않고,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한 순례자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사실 우리는 이 순례길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고통스러웠다. 말할 수 없는 삶의 아픔과 고통에 슬퍼하다, 방황하다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시작한 순례길이었다. 누군가 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갔냐고 물을 때, 구도자라는 멋진 말로 우리를 포장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곳은 도피처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걷고 싶었다. 아니 살고 싶었다. 삶에 대한 희망마저 놓을 수 없기에…
순례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의 꿈이 있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도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하거나, 영감을 얻거나, 삶에 대한 희망과 동기를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를, 그러한 순간을 꿈꿨다. 하지만 10월 20일에, 우리가 꿈꾸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지만 그러한 순간은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단 하루도 머물지 않았다. 우리는 ‘이 끝’을 현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에 있는 피니스테라(Fisterra)를 우리의 ‘끝’, 목적지로 다시 설정했다.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그곳에 가면 뭔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우리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약 100KM를 더 가서 피니스테라에 도착했다. 대서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피니스테라 전망대에 도착하니, 표지석이 하나 보였다. 이 표지석에는 이런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 표지석 뒤에는 망망대해, 힘찬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뿐이었다. 꿈꾸던 현실이 ‘현실’이 되는 순간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끝을 ‘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 달 넘게 힘들게 버텨왔는데,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기대했던 결과를 손에 넣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꿈꾸던 현실이 ‘현실’이 되었는데, 기쁘지 않았다. 그저 힘들었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꿈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다시 차가운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우리가 고민하던 인생의 문제들 중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아프고, 괴로웠다. 현실에 대한 냉소로 뒤덮인 생각이 마음에 찾아왔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없을 수도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없다”
하지만 불현듯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제 서쪽을 향해 걸어갈 길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다시 동쪽을 향해 걸어가면 아직 900KM가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 피니스테라에서 만난 ‘0.00 KM 표지석’을 끝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새로운 꿈을 또 꿀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피니스테라에서 다시 꿈을 꾸며, 다시 순례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