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동 바흐하우스 by 비채 황재혁
더 이상 가을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겨울도 아닌
2019년 11월 25일에,
나와 아내는 서울시 관악구에서
부천시 원미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지난 9월에 이사를 처음 결정하고,
부천을 돌아다니며 여러 지역을 알아봤지만,
우리가 가진 돈으로 마땅한 전세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원미동 뿐이었다.
우리가 관악구에 살 때 살림이 많지 않은 편이었기에,
이사 당일에 포장이사를 부르지 않고 용달 트럭 두 대를 불렀다.
새벽 6시부터 이삿짐을 정신없이 날라,
용달 트럭 두 대에 살림살이를 다 옮겨 놓고,
이사 갈 채비를 마쳤다.
이삿짐은 다 준비되었지만,
나는 도시가스 검침원이 그때까지 집으로 오지 않아서,
검침원을 집에서 더 기다려야 했다.
검침원과 이제껏 사용한 가스비를 정산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용달 트럭 두 대를 먼저 부천으로 보내고,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는 집에 홀로 남게 되었다.
내가 관악구의 집에 처음 이사 온 게 2018년 12월 초였으니깐,
나는 1년 남짓 살다가 원미동으로 이사하는 꼴이었다.
그 누구도 내가 이사 온 지 1년 만에 원미동으로 이사를 가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이곳에서 최소한 2년 이상 살 줄 알았다.
결혼하고 한 달쯤 지났을까?
아내가 계속 배가 아프다고 했다.
처음에는 단지 소화불량이나 변비 정도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아내가 계속 몸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나는 그 당시 아내가 직장 일 때문에,
피곤하기 때문에,
몸이 안 좋은 것이라 여겼다.
아내는 이해할 수 없는 복통이 계속되자,
혹시 임신이 아닌가 싶어서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스스로 검사를 했다.
첫 번째 검사 결과는 한 줄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다음날 또 검사했다.
아내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세 번째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했다.
임신테스트기의 결과만 보면 분명 임신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계속 배가 아프다고 말했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았지만,
우리는 임신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아내의 배가 아픈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에 내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아내가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신테스트기를 다시 보니,
희미하게 두 줄이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도 그것을 가져오라고 해서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지난번에 한 줄이었던 임신테스트기에
아주 가느다란 선이 하나 더 생겼다.
"에이 설마 임신인 건가?" 아내한테 빨리 새 임신테스트기로 검사해보라고 했다.
희미하지만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다.
이렇게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시점에 새 생명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아직 아빠와 엄마로서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던 신혼 때 말이다.
아내는 임신하고 한 달 정도 지나면서부터 심하게 입덧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못 먹고 물만 먹어도 괴로워하던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외향적이던 아내가 입덧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우울증 환자처럼 의욕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내는 두 달 정도 입덧으로 고생하더니 9월 초부터는 서서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아내의 입덧은 잦아들고, 아내의 배도 조금씩 나와서, 미약하나마 태동도 느낄 수 있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이런 고민이 들었다.
과연 이 집이 최선인가라는 고민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은 신혼부부가 아기 없이 살기는 적당하지만,
출산과 육아를 감당하기에는 조금 비좁게 여겨졌다.
그래서 아내와 9월 중순에 집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결정했다.
우리 부모님이 계시는 부천으로 이사 가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9월에 부천으로 이사를 결정하고,
10월에는 직접 원미동의 집을 알아보고,
11월에 원미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11월 25일로 이삿날이 처음 잡혔을 때, 나는 그날이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날은 우리에게 금방 다가왔고,
우리는 11월 25일 월요일 새벽부터 이삿짐을 싸야 했다.
이사를 시작하면서도 이게 과연 옳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들었다.
관악구를 떠남으로써 안정적인 소득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세계에 몸을 내던지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나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우리는 원미동으로 이사를 떠났다.
아무런 사고 없이 용달 트럭은 먼저 원미동에 도착해 짐을 풀었고,
나는 점심 즈음이 되어서야 택시를 타고 간신히 원미동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이사를 해서 모두 배가 고팠기에 중국집에 주문을 해서 점심을 배달시켜 먹었다.
하나하나씩 짐을 정리하는 중에, 무선인터넷을 설치하기 위해 설치기사가 집으로 방문했다.
무선인터넷의 라인을 연결하고 공유기를 세팅하던 설치기사가 와이파이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고 동생이 물었다.
“바흐하우스가 뭐야?”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이런 답변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몇 초 만에 원미동 바흐하우스가 탄생했다.
바흐와 아무런 관련도 없고, 음악도 전공하지 않는 내가
이 집을 바흐하우스라고 이름 붙인 게 우습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고층 빌딩으로 가득 찬 강남도,
처음 개발할 때는 논밭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집이 원미동 바흐하우스가 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앞으로 이 원미동 바흐하우스에서 울려 퍼질 비움과 채움의 하모니를 기대해본다.
손열음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바흐의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출처: Cliburn 2009 Yeol Eum Son Final Recital https://youtu.be/JNJdjtNxop0 via @YouTube
서평 전문 블로그 '카이노스 카이로스'의 큐레이터 황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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