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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샙피디 Jun 13. 2022

이해가 된다고 해서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가만히 멈추어 생각한 시간들 002 



다시 찾은 옐로우버거는 'The Yellow' 로 바뀌어있었다. 유쾌하신 사장님과 노란색 아이덴티티는 그대로인데 이제 이 사진 속 와이키키는 다시 맛볼 수 없게 되었다.


 날도 좋고 마음도 좋은 날 태재 작가님 스무스를 읽어보자는 핑계로 인덱스에 갔다. 과소비하지 않기로 대충 결심해서 그런지 결국 9만 원어치를 긁었고, 9만 원을 더 온전히 누리고자 복층 자리에서 2시간 정도 책 읽으며 있다가 의자가 불편해서 밥을 먹으러 나왔다. 이미 이 귀엽고 소중한 커먼그라운드에서 9만 원이나 썼지만 옐로우 버거를 이 맑은 날 또 언제 먹어볼까 싶어서 테라스에 앉아서 와이키키 버거를 시켰다. 


 먹으면서 글쓰기 과제를 하려고 노트를 폈다. 글감을 한번 읽었는데 두둑한 인덱스 쇼핑백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흐뭇한 기분으로 새로 업어온 책들의 냄새를 맡는다. 6권이나 사서 들고 갈 엄두가 안 나지만 평일 이 시간에 사고 싶은 책 잔뜩 사고, 맛있는 커피 마시고, 맛있는 버거 먹으러 와서 여유 부리고 있는 내가 새삼 대견해 또 흐뭇해하는 중에 주문한 와이키키가 나왔다. 이 반짝이는 순간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데 또각또각 소리가 평화로움을 깨고 다가온다. 점점 가까워지더니 많고 많은 자리 중 내 바로 옆 테이블에 앉는다. 


 커플이다. 남자는 사장님께 메뉴판에 없는 지금은 사라진 지난 메뉴를 요청하고 굳이 또 옆 가게에서 커피를 사 와도 되냐고 물으며 사러 갔다. 남자도 여자도 목소리가 커서 나의 소소한 평화는 깨졌다. 빨리 먹고 카페 가서 소소한 평화를 이어가야지 하고 버거를 한입 냠. 너무 맛있다. 최대한 옆 테이블 이야기 소리를 브금으로 묻으려 애쓰며 글감을 노려보고 다시 펜을 들었는데. 


“.. 이해가 된다고 해서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옆자리 여자의 말이 귀에 꽂혔다. 순간 내 기억 속의 어떤 장면들이 꺼내졌고, 기억을 더듬으며 메모장 앱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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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4.30. 1:12

썸 타는 레드는 퇴근하고 썸남과 만났는데 코시국 통금으로 2차를 썸남의 집으로 갔고, 아빠한테는 야근이라고 했지만 결국 1시가 되도록 안 들어왔다. 아빠의 집착은 열두 시 반부터 시작되었다. 아빠는 걱정이 많고 그 많은 걱정은 매번 집착이 되어 우리를 괴롭혔다. “레드는 왜 안 들어오니? 어디 있는 거야? 회산데 아직 못 오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전화. 카톡. 전화. “왜 연락이 안 되니 얘는. 이상하네” 주로 나한테 묻는 말이거나 혼잣말이다. 


한참 뒤 레드가 택시 탔다고 카톡을 했다. 아빠는 톡을 확인하고 바로 전화를 걸었고, 당연히 레드는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택시 탄 곳이 회사 쪽이 아니었을 거고 예리한 아빠는 택시나 주변 소리로도 어디인지 유추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도 많이 썼던 방법이다. 예리한 아빠의 집착에 대응할 방법 따윈 없고 그저 상황을 말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렇다. “얘는 왜 전화가 안 되니 톡은 하는데.” 너무 답답했다. 내가 약속이 있어서 늦게 들어오면 저렇게 걱정하고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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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4.5. 11:23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빠는 집에 같이 있을 때, 밥을 차리면서 나에게 밥을 먹을지 말지 물어본다. 몇 인분 치를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이때 약속이 있어서 안 먹고 나가야 하는 경우에는 스케줄까지 공유된다. 나가서 먹는다고 하면 “왜? 누구 만나?”가 마침표처럼 따라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공유되어버리는 내 스케줄. 딱히 공유하고 싶지 않은 스케줄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공유가 된다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일상이 되면 매우 피곤해진다. 집에서는 작업에 집중이 안 돼서 자주 카페에 나가는 것도 매일 어떤 카페 가는지 뭐하러 가는지 물어보는 리암 니슨 아빠와 함께라면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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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 8:05

‘사랑’이라는 안 와닿던 단어를 새삼 느낌. 아빠가 술 먹고 아침에 들어와서 레드의 자는 얼굴을 보고 주저리주저리 하는 소리에 깼다. 일하다 만난 웃긴 손님 이야기,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 이야기를 한다. 자는 레드의 얼굴에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고 자는 얼굴 보면서 옛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애기 때 정말 예뻤는데 너희.. 이제 커서 징그러워.. 시간이 너무 빨라...” 매년 어버이날마다 본의 아니게 의무적으로 어색하게 꺼냈었던 사랑이라는 단어가 보이는 순간이었다. 아빠가 술 먹고 와서 주저리주저리 하는 게 처음으로 싫지 않았던 순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아이는 꼭 낳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건강검진 까먹지 말고 예약해야지.



  아이를 가진 부모이면서 자신과 부모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옆자리의 시끄러운 남녀가 그날의 평화로운 시간에 서른의 고민을 불러왔다. 4년 전의 나는 ‘사랑’이라는 게 눈에 보였다고 했다. 분명 그랬다. 지금은 확실히 더 자주 보인다. 아빠의 사랑도 엄마의 사랑도 이모, 이모부의 사랑도 눈에 보이는 것이 된 지금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무지로부터, 이기심으로부터, 개인주의로부터, 철없음으로부터, 마음이 미어지고 아플지도 모르는 미래의 상황으로부터 나와 아빠를 구하고 싶다. 우리가 지금보다 솔직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건강하게 아껴줄 때 서로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글을 마무리하려는 지금. 폰이 울린다.


(지이잉)  

'아빠더'


 오늘도 나는 퇴근도 하기 전에 집에 언제 들어올지 묻는 아빠의 질문을 받는다. “그린이 언제 출발하니? 1시간 정도 걸리니?” 1시간 안에 집에 들어왔으면 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나를 위해 만두를 사 왔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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