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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샙피디 Jun 09. 2022

위키수빈과 동화 같은 싱글 오리진 커피

가만히 멈추어 생각한 시간들 001

 주말 장사를 위해 월요일과 화요일에 쉬는 나에게도 목요일은 매우 피곤한 날이다. 월요일 같은 수요일을 보내고 화요일 같은 목요일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같은 따분하고 몸이 무거운 목요일 출근길이었다. 용산역 1번 출구를 나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위키가 말없이 등장해 가만히 쳐다봄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연구실 직속 선배이자 석사과정이라는 인생의 암흑기를 함께 헤쳐온 전우 수빈은 연구실에서도, 지금 같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도 얇고 넓은 지식으로 많은 이들을 위기에서 구하는 능력이 있다. ‘저런 건 어떻게 알고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 그와의 대화는 해당 정보들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왜인지 든든하다. 그래서 연구실 동기, 후배들은 물론 교수님과 선배들, 사무실 동료들에게도 그는 왜인지 든든한 존재다. 나는 이런 수빈의 능력을 발견한 순간부터 그를 ‘위키수빈’이라 부른다.


 위키에게 커피 없는 근무시간은 상상할 수 없다. 그날의 출근길에도 그는 횡단보도를 걸으며 “커피?”라 물었고 나는 그가 자주 가는 스타벅스로 향하며 좋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는 오늘은 스벅이 아니라며 새로운 길로 안내했다. 커피를 좋아하긴 하지만 잘 모르는 나는 따분한 출근길을 위키와 함께 떠나는 작은 어드벤처로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아서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스타벅스가 있는 대형 오피스텔의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 그 건물이 지하 1층까지만 있는 줄 알았던 나는 굽이굽이 돌아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출근길의 새로운 전개에 흥미가 생겼다.


 매장에 도착해 내가 메뉴판을 구경하는 동안 그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바로 주문을 했다. 그리곤 나에게 “너에겐 生 아메리카노를 추천”이라고 했지만 그 순간 나의 눈에는 알록달록한 컵 그림이 들어왔다.


 

 이어지는 새로운 전개에 눈이 동그래진 나는 위키의 추천을 뒤로하고 알록달록한 그림의 추천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림은 7개의 커피 종류를 소개하는 메뉴판이었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직접 내려 먹는 것의 행복을 알게 해 준 드립백 커피를 만난 뒤로, ‘원두의 다양함’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림책 같은 메뉴판에 홀려 ‘신데렐라’를 주문했다. 메뉴판에는 동화 속 주인공의 이름을 딴 커피 이름과 원두 산지 표기, 그리고 향, 산미, 단맛, 쓴맛, 바디감의 정도가 원두 알로 표기되어 있었다. 아직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감각들을 느끼지 못하지만 유독 정성스러운 메뉴판에 기대감이 커졌다.


 위키는 산미가 덜한 묵직한 커피를 좋아한다. 나는 나에게 커피 취향이 있는지 몰랐지만 얼마 전 위키와의 대화에서 산미 있고 달콤하면서도 깔끔한 커피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위키와는 정반대의 취향이다. 정반대인 성격의 우리가 커피 취향도 정반대라는 생각이 재미있던 찰나, ‘내가 주문한 신데렐라는 신데렐라처럼 착하고 순수한 맛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어서 ‘커피 이름을 동화 속 주인공으로 지은 이유는 뭘까?’라는 생각을 지나, ‘각 커피의 특징을 다양한 성격의 캐릭터에 빗대어 표현했다면, 나라는 커피는 어떤 맛일까?’라는 생각까지 들었을 때는 이미 건물을 나온 뒤였다.


 버스로 환승하기 위해 횡단보도에 섰지만 강한 햇빛이 싫은 나는 이내 가로수의 그늘에 몸을 숨겼다. 위키는 머리 위로 내리쬐는 쨍한 볕에도 그저 핸드폰을 바라볼 뿐이다. 초록불이 들어왔고 타이밍이 잘 맞아 우리는 빠르게 환승했다. 버스에 올라타 카드를 찍으며 커피와 사람의 성격에 대해 생각했다. ‘성격’이라는 단어는 대학교 막 학기에 들었던 이상심리학 수업을 떠올리게 했다. 이상심리학. 사람의 성격과 다양한 정신질환을 다루는 심리학과 교양수업이었는데, 이때 배웠던 ‘사람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인지 그저 교수님의 주장일 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수업 이후 다양한 경험들로 몸소 체험하고 아직까지도 공감하고 있다.


 그날 교수님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까다롭거나 순하거나 둘 중 하나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부모’와 ‘성장 환경’이라는 변수를 만나, 세상에 하나뿐인 성격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원두도 원산지에 따라 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고, 같은 농장에서 나온 원두라도 ‘바리스타’와 ‘보관 환경’이라는 변수에 따라 피노키오가 될 수도 미녀와 야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벨을 누르고 일어나 내리는 문 앞에 서서 카드를 찍고 버스가 정차하길 기다린다. 위키는 버스가 정류장에 멈출 때 일어나 카드를 찍는다.  


 성격도 커피 취향도 정반대인 우리는 같은 길을 같이 오면서도 각자의 방법으로 왔다. 이쯤 되니 ‘동화 같은 커피’ 메뉴판의 테이스팅 노트 표기가 커피들의 MBTI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음날 나의 수요일 같은 금요일을 위해 ‘장화홍련’을 테이크 아웃했다. 지금까지는 장화홍련이 나의 최애로 남아있다. 나라는 커피는 누군가에게 최애가 되었을까? 누구에게 최애가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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