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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라다 Oct 31. 2022

소설 토지와 끄적끄적 #4

과거의 상처는 나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다.

※ 이 글에는 토지 전반적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스포를 원치 않으시면 패스해주세요.


<토지 2권 제2편 추적과 음모 9장 과거의 거울에 비친 풍경>


Image by Pixabay


 치수는 천천히 눈을 들어 윤씨부인을 바라본다. 시선을 느낀 윤씨부인도 아들의 눈을 마주 대한다. 검은 점이 무수히 드러난 얼굴이었다. 잠 못 이룬 탓인지 눈 가장자리에 달무리 같은 푸른 빛깔이 드리워져 있었다. 처연한 모습이다.
'많이 늙으셨다.'
 긴 눈매, 눈매 속의 눈동자만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의지와 힘이 사무친 듯 남아 있다. 머리 모양 옷매무새는 방금 자리에서 일어난 것 같지 않게 단정하여 변함이 없다. 치수는 어머니의 흩어진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여전하시다! 언제나 저 모습, 저 눈빛, 대장간에서 수천 번을 뚜드려 만든 쇠붙이 같으다.'
 치수는 자신의 마음도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낀다. 많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심을 맴돌았던 뜨거움은 싸아 소리 내며 가는 것 같았다. 단련된 쇠붙이와 쇠붙이였다. 싸움터에서 적과 적의 칼이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쌍방이 혼신의 힘으로 겨루는, 숨결조차 내기 어려운 침묵, 긴장은 두 모자 사이의 공간을 팽팽하게 매운다. 치수는 어머니의 뻗치는 힘이 전보다 가늘어진 것을 느낀다. 대신, 보다 날카로워진 것을 피부로 심장으로 감득한다.

- 토지 2권 68쪽 중에서


늙은 어머니와 늙어가는 아들.

지금 방 안에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며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서로를 대하고 있다. 그리고 생생하게 자신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


서로가 다 불운한 형제는 윤씨부인에게는 무서운 고문의 도구요 끊지 못할 혈육이요 가슴에 사무칠게 사랑하는 아들이다. 십 년 이십 년 세월 동안 윤씨부인은 저울의 추였으며 어느 편에도 기울 수 없는 양켠 먼 거리에 두 아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치수를 가까이하지 못한 것은 물론 죄의식 때문이나 그보다 젖꼭지 한 번 물리지 않고 버린 자식에 대한 연민 탓이기도 했었다. 환이를 돌보지 못한 일 역시 치수에 대한 의무와 애정 탓이 아니었던가. 결국 십 년 이십 년 세월 동안 윤씨부인은 어느 편에도 기울 수 없는 저울의 추가 되어 살아왔었다. - p78


윤씨부인은 그 일을 겪은 후 자신의 삶의 현재를 살아낸 적이 있었을까?

어머니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치수 역시 그 자신의 상처 때문에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촉수를 곤두 세우느라 자신의 삶의 현재를 잃고 있지는 않았을까?

현재 시제의 관점에서 볼 때 과거의 일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변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대로 생각해 본다면, 그 일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 그 일로 내가 영향을 받았고 내가 영향을 받음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영향을 받았다. 그것을 다르게 생각하면 내가 영향을 적게 받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영향을 적게 받을 수도 있다는 게 아닐까? 치수와 환이, 모두에게 나쁜 엄마가 되기보다는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좋은 엄마일 수 있는 기회가 윤씨 부인에게 있지 않았을까? 반듯하고 철저한 윤씨 부인에게 치욕스러운 그날의 일, 임신 기간, 출산이 얼마나 큰 고통의 시간이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내 눈앞에 있는 아이의 내일을 위해 그 고통을 감내했다면 적어도 치수의 삶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오늘을 살고 있는 이상, 그 상처는 치유될 수 없는 것 같다.

그냥 덮어둔 과거의 상처는 언제 어디서나 불쑥 고개를 들어 '나 여기 있어. 나 좀 치료해봐.' 하며 말을 건다.

나는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외면하지만, 어쩌면 그 방법을 알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직면하는 것. 오롯이 그 상처를 바라보고 다시 상대와 대면하여 그 일을 꺼내어 놓는 것이 과거의 상처가 불쑥 말을 걸어와 아픔이 되살아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기 때문일지 모른다.


얼마나 더 기다리고, 얼마나 더 큰 용기를 내야 가능한 일일까...


윤씨 부인과 최치수가,

자신들의 결말을 알고 있다면... 이 날 방에서 나눈 대화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

해피엔딩을 원한다면, 과거의 거울에 현재를 비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거울로 현재를 바라보는 노력을 하자. 

그것만이 나를, 상대를, 우리를 보다 나은 관계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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