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파트 1층에 산다. 1층으로 이사 온 지는 2년쯤 되었다. 30년 넘게 12층 이상의 고층만 살던 내가 1층으로 이사 온 데에는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1층이 아닌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에 대단한 결심이 필요할 것이다.
1층을 계약하고 싶은 마음은 사실 추호도 없었다. 수 십 개의 집을 보다 지쳐서 들리게 된 곳이었는데, 창밖에 보이는 정원뷰가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덜컥 계약했다.
내가 살아본 1층은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해 주는 곳이 분명하다.
윗집에 소음은 내가 참거나 밖으로 나가면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오후 4시에 청소기만 돌려도 망치로 조용히 하라고 천장을 때리던 아랫집은 도저히 '인간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우리가 없는 시간에도 시끄럽다고 경비아저씨와 쫓아온 그들이었다. 윗집의 윗집, 혹은 옆집 기타 소음도 다 원인은 우리였다.
층간소음 때문에 1층으로 이사 가려는 건 아니었다. 결국 어딜 가나 위층이나 옆집 등 이웃집 원수가 있으면 삶의 질이 떨어지는 법이다.
어차피 확률 게임, 최소한 아래층 원수의 변수는 없는 곳으로 확률을 줄여보기로 했다.
그런데 1층에 살아보니 아랫집 층간소음 스트레스에서 자유롭다는 장점 이외에도 다른 좋은 점이 훨씬 많았다.
제일 의외였던 건 1층이 제일 안전하다는 사실이다. 공동 현관문을 지나 집 앞에 들어오는 순간까지 CCTV가 안전하게 지켜준다. 현관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 앞, 우편함, 킥보드 등을 놓는 별도 공간까지 모든 곳에서 말이다. 우리 집 현관 앞에 쿠팡이나 마켓컬리 택배가 10박스씩 쌓여도, 택배가 쌓인 채 해외여행으로 장기간 집을 비워도 그 어떤 것도 분실된 적이 없다. 이전에 10년 이상 1층에 사셨던 분이 '1층이라 더 안전하다'라고 말했을 땐, '난 그게 제일 불안한데요' 속으로 대꾸했었는데 이제 나도 알겠다.
또한 불이 나거나 지진 등 긴급상황에서도 1층은 신속하게 대피할 수가 있어 좋다. 마지막으로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아이들이 사고로 추락하는 걱정 없이 마음껏 놀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 좋다. 그래서 나도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1층이 제일 안전해요!"
'역세권'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역세권은 기차역이나 지하철역 등 역을 중심으로 그 세력이 미치는 권역이다. 업계에 따르면 아파트 가격이 역에서 1분 거리만큼 멀어질 때마다 아파트 가격이 평균 1.5%씩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아파트 평균값이 10억이라 할 때, 1.5%는 천오백만 원이다. 1층은 문만 열고 나가면 되니, 다른 층에 비해 최소 3분에서 5분 이상의 시간을 줄여준다. 이 시간을 아파트 평균값에 대입할 때 1층 거주는 다른 층에 비해 4500만 원에서 7500만 원의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하루 2번 나갔다 들어온다고 생각했을 때 최대 10분, 1년에 3,650분으로 60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에 내 하루의 운을 맡기지 않아도 된다.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를 코 앞에서 놓쳐 하루를 '아 오늘 일진 안 좋네' 시작하지 않아도 되고, 일단 눌러 놓고 신발 신으러 뛰어가다가 구둣주걱에 걸려 넘어질 일 없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려고 코 막고 나왔는데 하필 우리 층을 지나쳐 꼭대기부터 차례차례 사람들이 만원으로 타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유가 된다.
최근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OECD 회원국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통계청 '2023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올해 기준 65세 이상 인구는 950만 명에 육박한다. 이는 전체 인구의 18.4%로 2024년에는 노년인구 1000만, 인구 비중 20% 가까이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노년인구의 증가는 아파트 선호도뿐만 아니라 주거의 패러다임도 바꾸고 있다. '역세권', '벅세권', '숲세권'이 부동산 트렌드였다면, 최근에는 '병세권(병원이 가까이 있어 신속하고 우수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주거지역)'이 주목받고 있다. 또한 저층 선호도가 높아짐에 따라 아파트 '로열층'이 '중층~중상층'에서 '저층'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즉 1층은 향후 선호도(수요)는 증가하면서 공급은 한정적으로(한 아파트당 평균 2개) 미래 투자가치도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살면서 발견한 장점들이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아파트에서 정기적으로 창 밖 수목들을 방역해서 그런지 모기 한 마리 물려본 적 없다는 점(벌레도 없다), 우리 집 정수기 문제로 물이 새고 있었는데 아랫집이 없어 천만다행이었다는 점 등(경비아저씨 말씀이 보통 이런 경우 아래층, 그 아래층까지 도배에 문제 생겨서 물어줘야 한다고 하셨다.)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난 다시 이사 간다고 해도 무조건 1층으로 이사 갈 거다.
1층으로 이사 온 후 우리 딸은 '하늘을 날겠다'는 멋진 꿈이 생겼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진지하게 매일 연습하는 그녀다.
소파에서, 침대에서 점프하며 0.1초라도 더 날기 위해, 열심히 세차게 팔을 파닥거린다. 휴대폰 스톱워치는 '나는 연습'에 필수품이다.
어제보다 몇 초 더 날았는지 기록하는 그녀는 지독한 노력파고, 포기를 모른다.
나는 그녀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주기로 했다. 같이 기록을 측정하고, 오늘은 팔이 어제보다 몇 번 더 많이 움직였는지, 다리는 굴렀는지 등을 체크하며 그녀의 꿈을 응원하고 있다. 또한 그녀의 꿈이 커질수록 더욱 두꺼운 이불로 충격을 흡수해 주는 노력도 하고 있다 ^.^
1층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매일 조금씩 날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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