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소년이 온다>, 한강

by 맴맴

“펜은 칼보다 강하다.” 흔한 문장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가 얼마나 날카롭고 진실한지 절절히 깨달았다.

한강. 그녀가 왜 노벨문학상을 받아야만 했는지, 아니 받아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이 책 한 권이면 충분히 설명된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내가 그동안 뉴스로, 영화로,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광주’와는 완전히 달랐다. 단 한 페이지도 가볍지 않았고, 단숨에 읽혔으나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소년이 온다』는 그 어떤 칼보다 날카롭다. 작가의 문장은 담담하지만, 그 속엔 참혹함이 있다. 이유도 모른 채 죽임당한 사람들, 평생 죄책감과 트라우마 속에 살아야 하는 이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책임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삶을 누리고 사라졌다는 사실 앞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촛불 주위에 어른거리는 혼들이 도시에 남아 누군가를 위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눈도 없고, 혀도 없고, 목소리조차 잃은 채로 어둠 속에 서서 서로를 알아보는 그림자들. 한강은 그 혼들의 이야기를 써줬고, 나는 그 덕분에 이 참혹한 진실과 잠시나마 함께 머물 수 있었다.

끝내 말하지 못한 자들의 말, 끝내 살지 못한 이들의 삶이 책장마다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 여운은 앞으로도오래도록 가슴 깊이 남을것 같다.


나는 한강의 책을 읽고 나면 종종 악몽을 꾼다. 아마도 그녀의 소설이 꼭 내가 겪은 일처럼, 내가 그 현장 한복판에 있었던 것처럼 몰입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었을 뿐인데 꼭 감염병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들기도 한다. 누군가의 미움과 슬픔이 내 심장 속도 휘젓고 파고들고 아프게 한다.


『소년이 온다』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기록이고, 애도이며, 저항이다. 한강이 이 책을 써줬다는 사실, 그리고 이토록 아름답고 단단한 문장으로 이 비극을 남겨줬다는 사실에 나는 깊이 감사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던 시간에, 그녀는 말했고, 써냈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 용기와 책임감이 오래도록 내 안에, 우리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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