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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안천인 Oct 10. 2021

거짓말쟁이 아냐의 새빨간 진실

프라하의 소녀시대

오래 전인 2001년에 출간된 책이라 교바시(京橋) 도서관의 직원이 지하 서고에서 책을 가져다준다. 요네야마 마리(米山万理) ‘거짓말쟁이 아냐의 새빨간 진실(噓つき アーニャ の真っ赤な真実)’ 한국에서는 '프라하의 소녀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주로 경영, 경제 관련 서적들만 읽는데, 책으로 엮인 에세이집을 만나기도 실로 오랜만이다.


이 책은 프라하의 소비에트 국제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일본 등 4개국 친구를 저자 마리가 찾아 떠나는 회상기이자 여행기다. 여자 아이들은 초경을, 남자아이들은 음모가 생겨나 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사 학년 시절의 에피소드부터 시작하는 초반부는 옛 추억을 떠 올리며 가볍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각각 친구들의 삶을 격변의 이데올로기 근대사에 투영시켜 한 편의 대하소설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스의 파란 하늘을 동경하는 릿차, 새빨간 진실과 함께 미워할 수 없었던 거짓말쟁이 루마니아인 아냐, 하얀 도시 베오그라드의 매력을 알게 해 준 지적이고 침착한 유고슬라비아인 야스나. 이들의 3가지 색깔은 자유, 박애, 평등이다. 마리는 그 친구들과 부모님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고위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이 무엇이었던지, 그들이 지켜왔던 그 이념이 무너지는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이 어떻게 변해갔으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던 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의 삶과 운명의 근저에는 1968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탄압으로 짓밟힌 ‘프라하의 봄’,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의 붕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독립선언이 발단이 된 유고 다민족 전쟁이 있었다.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며 투쟁하던 그들 역시,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아이의 장래를 먼저 걱정하는 ‘부모’였고, 역사의 운명 속에서 격동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나약한 ‘개인’이었다. 릿차의 아버지는 릿차가 세계 어디에서라도 자유롭게 살도록 해 주기 위해서 공부를 독려하여 카로리나 대학 의학부에 입학시켜 의사를 만든다. 일반인들은 외국인과의 결혼이 허용되지 않았던 루마니아 출신의 아냐도 고위 공직자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영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영국에 정착하고, 루마니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30여 년이 지나 만나 친구들은 모두 자유롭게 살기 위해 나름대로의 인생을 개척해 왔다.


아냐는 "언어는 사람을 연결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친구 사이에는 그 뉘앙스를 알 수 있어 이상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지구 상의 구체적인 장소에서, 구체적인 시간에, 어떤 민족에 속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구체적인 문화, 기후 조건 하에서 어떤 언어를 모국어로 해서 성장하게 돼. 어떤 인간에게도 마치 넓은 바다의 한 방울 물처럼 바탕이 되는 문화와 언어가 살아 있어. 또 거기엔 모국의 역사가 수호신처럼 얽혀 있고. 그런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 (p.182)


마지막의 다음 구절에서는 코로나 19가 하루빨리 종식되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버스가 점점 급경사를 오른다. 버스가 다다른 곳에서 야스나의 재촉으로 버스를 내렸다. 야스나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린 나는 숨을 꿀꺽 삼켰다. 절경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사바 강과 도나우 강이 합해지면서 생긴 예각지가 무너져가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성벽 건너편으로 구시가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뒤로 기복 있는 마을 풍경이 보인다. 더 멀리로는 한적한 농촌 지대가 펼쳐져 있다. "너무 아름다워서 터키군이 싸울 마음을 잃고 물러간 심정을 알 것 같아. 아마 저 기슭에서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성벽을 보고 '하얀 도시!' 하고 외쳤을 거야." (p.282)


오랜만에 참 재미난 책을 읽었다. 저자 요네하라 마리(米山万理) 선생이 요절하셨다기에 참 안타깝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민족, 종교, 사고방식의 문제로 자살 폭탄 테러까지 자행하며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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