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효과는 정서안정, 어휘력, 표현력, 사고력, 상상력...
히마리의 세 번째 생일에는 백팩과 겨울용 티셔츠를 선물했다. 축하 카드도 적었다. 아직 직접 읽지는 못하더라도 만난 후 처음 맞는 생일을 기념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손으로 엽서를 적었다. 天仁의 필체가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촉이 두꺼운 색연필로 히라가나를 예쁘게 적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히마리가 좋아하는 무지개 색상을 섞어가며 정성껏 적었다. 天仁네에 놀러 오기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서였다.
3살 생일 축하 엽서를 직접 읽은 히마리
그런데, 저녁에 히마리 엄마가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히마리가 天仁이 보내 준 엽서를 직접 읽고 있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깜짝 놀랐다. 아이 엄마조차도 히마리가 이렇게 히라가나를 잘 읽을 수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 제대로 가르친 적도 없고, 목욕탕에 오십음도(五十音図)를 붙여 두고 매일 목욕을 시킬 때 간혹 한 번씩 읽었던 것이 전부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天仁 친구 인제아저씨가 만들어 준 피카추 그림에 적혀 있던 자신의 이름을 읊조렸던 기억이 난다. 분명 자신의 사진이 아닌 적혀있는 이름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3살 아이가 혼자서 히라가나를 터득했다니 놀라운 일이고, 글자를 읽을 수 있다니 대단한 일이다. 天仁이 보낸 엽서 덕분에 모두 히마리가 글을 읽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류의 여러 문명수단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 중의 하나가 문자의 발명 아니던가. 오랜 전에 보았던 영화 '스탠리와 아이리스(Stanley & Iris)'가 생각난다. 아픔을 가진 중년의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는 따뜻한 이야기였다. 문맹이었던 남자 주인공 스탠리는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아이리스에게 글을 배우고, 성공하게 된다. 글을 배운 뒤 스탠리가 아이리스에게 편지와 카드를 적어 보내던 장면이 기억에 새롭다. 로버트 드 니로와 제인 폰다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글을 읽을 줄 아니 놀이도 풍부해져
히마리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외출, 산보, 놀이가 더욱 풍부하고 윤택 해졌다. 화단의 팻말에 적힌 꽃 이름을 함께 읽었고, 게시판 앞에 서서 우리가 어느 공원 어디에 있는지도 얘기했다. 히마리는 어느 아파트 몇 동에 살고 있는지도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기발함에 깜짝 놀랐던 에피소드도 있다. 天仁네 아파트 단지의 화단에는 ‘개를 산보를 시키지 마세요(犬の散歩はせて行けません)“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이를 본 히마리가 ”그럼, 고양이는 산보시켜도 괜찮아?”라고 물어본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깜짝 놀랐지만, 간단하게 답해 주었다.
“고양이는 산보를 시키지 않기 때문에 적어 놓지 않은 거야. 히마리는 새로운 놀이도 잘해보고, 처음 본 음식도 잘 먹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아. 고양이는 겁이 많고, 병에 걸리기도 쉬워서 산보를 시키지 않는 거야. “
“아, 그렇구나 “
어느 주말에는 그림을 그리며 놀다가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크레용으로 여러 가지 무지개를 그리며 놀고 있었다. 그날 히마리는 유독 검은색 크레용은 쓰지 않으려고 했다. 영화 기생충의 ‘미술은 잘하지만 미대는 못 간 기정‘이도, 미술치료사도 아니지만 히마리가 어두운 것을 싫어한다는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아이 엄마에게도 검은색 크레용은 유독 사용하지 않더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랬더니 최근에 읽은 그림책 '까만 크레용(くれよんのくろくん)'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늘 그림책을 읽어 주었는데, 요즘은 혼자 읽기도 한다고 했다. 혼자서 그림책도 읽는다고요?
그림책 빌려다 주기 프로젝트
주말에 도서관에 갔다가 히마리가 읽었다는 까만 크레용 시리즈 그림책 4권을 모두 다 읽어보았다. 색채 감각이 뛰어나고, 무지개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3살 히마리가 좋아할 만한 내용이었다. 문득 이 많은 도서관의 그림책들을 빌려다 읽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엄마는 쌍둥이 육아, 가사, 회사 일까지 해야 해서 도저히 도서관에 갈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또, 좁은 집 공간, 빠르게 자라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림책을 일일이 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책 사기를 좋아하는 天仁도 보관장소, 무게 때문에 가능한 책 구입을 줄이고, 책 버릴 고민을 자주 한다.
도서관의 키즈룸 서가를 꼼꼼히 둘러보았다. 그림책 읽어주기 정기 행사가 있다는 것도, 그림책은 모두 작가 이름 순으로 서가에 배치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이별 추천 자료도 비치되어 있어 가져 왔다. 좋은 그림책을 찾는 방법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더니 그림책 읽어주기 협회, 엄마들 모임, 출판사의 추천 도서 등 다양한 정보가 있었다. 결론은 연령에 맞는 명작부터 엄마모임 추천 도서, 도서관의 인기 대출 도서, 신착 도서 순으로 읽히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먼저 天仁이 20권을 선정해서 히마리에게 읽히면 어떻겠냐고 아이 엄마한테 제안했다. 天仁이 매주 도서관에 가니 그때 빌려오겠다고 했다. “염치없지만, 제가 할 수 없으니 빌려다 주시면 좋지요.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라는 답장이 왔다. 선정한 책들도 다 좋은 것 같다고 했다. 히마리의 그림책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히마리는 동화책 읽기를 너무 좋아했다. 재미난 책은 몇 번씩이나 읽는다고 한다.
대출 우선순위의 방침을 정해 놓기는 했지만, 모든 책이 다 적절한 것은 아니었다. 좌충우돌, 간혹 소개문 보다 글자 수가 너무 많고 어려운 책도 있었다. 아이 엄마는 그런 책도 때때로 필요하다고 했다. 목욕을 마친 뒤에도 자지 않고 까불며 더 놀고 싶어 할 때 읽히면 즉효라는 농담도 했다. 아이 엄마에게 책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면서 히마리의 그림책에 대한 호불호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天仁도 그림책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200쇄가 넘는 그림책은 왜 그리 오랫동안 인기가 있는지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고, 인기 작가들의 화풍, 성향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天仁이 읽어도 재미난 것이 많아 天仁도 그림책 팬이 되었다.
도서관 데리고 가기
아이를 도서관에도 데리고 갔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도서관에 오는데, 히마리는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히마리는 도서관에 가는 것을 너무 좋아라 했다. 마을 도서관의 키즈룸에는 그림책이 많을 뿐만 아니라 넓고, 밝고, 천장이 높아서 좋다. 정기적으로 작가, 사서 선생님의 그림책 읽어주기 행사도 열린다.
도서관에 가면서 히마리는 天仁에게도 그림책을 자주 읽어 달라고도 한다.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주면 아이의 정서 안정에 매우 도움이 되고 생각이 동화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더 정이 들고, 친해진 것 같다.
여담이지만 그림책을 읽어 줄 때 처음에는 天仁에게 어려운 점도 있었다. 한자 없이 히라가나로만 적혀 있고, 띄어쓰기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문장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天仁도 성인이 되어 독학으로 일본어를 깨쳤고, 늘 한자로 적혀있는 경영, 경제 관련 책들만 읽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를 ‘お祖父さん何処へ行きますか’처럼 한자로 적으면 한자의 의미를 아는 天仁 눈에 쏙 들어오지만, ‘おじいさんどこへいきますか’라고 히라가나로 적혀 있으면 끝까지 다 읽어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히마리가 그림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먼저 한 번 훑어보고 읽어 주기도 했다.
어휘력, 표현력, 사고력, 상상력 등 현저히 향상
그림책을 빌려다 주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히마리는 약 2백여 권의 그림책을 읽었다. 아이도 컸지만 어휘력, 표현력, 사고력, 상상력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향상되었다. 엄마가 동생들을 먼저 챙겨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던 히마리. 그림책의 예쁘고, 따뜻한 그림들, 이야기와 함께하며 정서적으로도 많이 안정이 된 것을 느낀다. 그림책 빌려다 읽히기는 히마리를 위해 참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늘 히마리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