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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시작

히마리가 찾아오면서 시작된 인연

by 리안천인

토요일 아침, 전날의 숙취가 남아있어 오랜만에 늦게까지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어제 저녁에는 오랜만에 사무실로 음식을 배달시켜 친구 K군과 술을 마셨다. 코로나 여파로 식당에 가지 못한 지도 벌써 1년이나 된다.


오전 10시쯤 인터폰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현관에서 아내가 누구와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다. 잠시 후 아내가 들어오며 놀란 목소리로 天仁을 깨운다. “어떡하지요. 405호 히마리 짱이 놀러 왔었는데, 우선 돌려보냈어요.” 아이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가져온 양과자점 쿠키에 미도리(碧, みどり)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고 갔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주말에 놀러 보내도 된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빈말은 아니었다. 시간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 바로 찾아와서 적잖게 놀랐을 뿐이다. 숙취가 남아있어 상쾌하지 않은 머리 상태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가 놀러 가고 싶다고 떼를 쓴 것 같다. 지난번에 집에 잠깐 들어왔을 때 아주 즐거워했었는데,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쓸쓸히 돌아갔을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몇 번 잠깐씩 이야기를 해 본 경험으로는 아이엄마 미도리 씨도 아주 경우가 바른 사람이다. 바로 전화를 걸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정말 미안하다. 시간 약속은 하지 않아, 사실 놀러 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항상 일찍 일어나는데 공교롭게도 오늘은 이제야 일어났다. 혹시 괜찮으면 오후에 놀러 오시면 어떻겠느냐?”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랬더니, “12시에 점심을 먹이고 두어 시간 낮잠을 재운다. 나중에 아이에게 의견을 물어보겠다”라고 한다.


바로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집을 청소했다. 분명히 다시 놀러 올 것 같다. 처음 놀러 오는 아가 손님, 걱정이 앞선다. 34개월 여자 아이가 놀러 오면 뭘 하고 놀지? 한국의 집을 정리하고 일본에 가족이 함께 이사 온 지 만 3년 5개월. 3년 계약 기간 동안만 지내다가 귀국할 생각이었기에 2 LDK의 天仁네에는 살림살이도 많지 않다. 장난감이라도 좀 사 가지고 올까? 그림은 그릴 수 있을까, 크레용을 사 올까? 그러나, 우선 집에 있는 것만으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집에 있던 일본 동요집이 먼저 떠오른다. 일본의 유명한 동요가 50여 곡 수록되어 있는 책인데, 그림책처럼 그림이 많아 아이가 재미있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동화책도 두 권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리사이클하는 오래된 책을 참고하고자 가져다 둔 것이다. 天仁이 자료를 읽을 때 사용하는 형광펜, 색연필도 꺼내 두었다. 과일, 쿠키, 요구르트 등의 간식과 함께 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한 것은 모두 생각해 두었다. 그룹 회장실 의전 담당 비서 출신이라 비교적 행사 준비에 능한 편이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아이 손님의 방문에 대비하기는 정말 당황스럽다.


天仁네에 놀러 가고 싶다는 히마리 짱을 데리고 오후에 다시 온 미도리 씨는 아이만 두고 30분쯤 뒤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집에 쌍둥이들이 있으니 엄마가 히마리와 함께 놀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아동 성추행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어서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 놓을 테니 언제든지 그냥 들어오시라고 말했다. 현관과 복도에 불도 켜 두었다. 그리고, 혹시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겠다고 했더니 10개월 된 쌍둥이는 아직 자고 있어서 금방 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라인* 친구를 맺었다. 이후 그 라인은 1만 장을 넘는 히마리 짱의 사진을 보내고 정보를 교환하는 핫라인이 되었다.


처음 놀러 온 히마리 짱은 장난감도 필요 없이 너무 잘 놀았다. 아직 어리지만 자기표현도 잘하고, 밝고, 매우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34개월 아이 답지 않게 인정도 많았다. 포도를 줬더니 맛있게 먹으면서 天仁에게도 먹으라고 권해서, 처음으로 아이에게서 감동을 받았다. 색연필을 주었더니 그림을 그리지는 않고 양손으로 북을 치듯 두드리며 놀기도 한다.


“우와~ 히마리 짱은 북을 잘 치는구나. 색연필로 북을 칠 수도 있네.” "어린이집에서 북을 쳐 봤어요. 하하"


그런데, 북을 치는 아이의 표정에서 언뜻 스트레스가 꽉 찬 듯한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약 1시간 동안 눈을 떼지 않고 함께 놀아주며 주의 깊게 살폈다. 학부시절 재미로 한 학기 들었던 아동심리학도 떠올렸다. 동생이 태어난 후 동생에게 사랑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과 불안감이 생긴 것은 아닐까? 아직 한 돌도 되지 않은 어린 쌍둥이 동생들을 챙겨야 하는 엄마가 히마리 짱과 많은 시간 함께 놀아주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이와 함께 있어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놀아주는 것이 최고의 장난감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히마리가 동생들의 목을 조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동생들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그립고, 힘들면 그랬을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이지만, 히마리는 어쩌면 최대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그래서, 히마리를 만나면 늘 아이에게만 집중하고 함께 놀아준다. 엄마가 데리고 다니지 못하는 곳에 함께 가 주기도 한다. 도서관에 데리고 가고, 그림책을 빌려다 주고, 지하철 타기, 외식의 경험을 시켜 준 것도 모두 그런 이유였다.


법정스님은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좋은 일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을 구분해서 연을 맺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히마리 짱이 天仁네에 찾아오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진실을 투자해도 될 인연인 것 같다. 그리고, 天仁은 히마리의 ‘파파오지상**’이 되었다.


주)

*. 한국사람 대부분이 카톡을 사용하는 것처럼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라인을 사용한다.


**. 히마리 짱은 天仁을 ‘파파오지상’이라고 불렀다. 아이 엄마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일본어 오지상(おじさん)은 아저씨라는 뜻. 추측건대, 아빠와 떨어져 엄마와 자매들과 사는 히마리가 남자인 天仁이 아빠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아저씨 같기도 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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