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할인판매, 업무용 마트, PB 상품 이용도 증가
오후 8시, 마트의 도시락 매대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서성인다. 그러다가 할인 스티커를 든 직원이 나타나면 우우 매대로 몰려든다. 직원은 도시락의 30% 할인 스티커 위에 50% 할인 스티커를 덧붙여준다.
일본의 마트 폐점 시간 30분 전의 흔한 풍경이다. 마트의 할인 시스템을 알고 있기에 한참을 서성인 것이니 부끄러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보이는 분들인 것 같아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다.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 작년 하반기 이후 더욱 도드라진 모습이다.
아침 10시, 마트 앞에서 줄을 서서 오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반값으로 할인하는 신선제품을 사기 위한 사람들이다. 마트에서는 우유, 유산균 음료 등의 가공식품도 이른 시간부터 반값으로 판매한다. 전날 영업이 끝나기 전에 할인 스티커를 붙였는데도 팔리지 않고 남은 것들이다. 그래서 오전에 장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이 시간대의 고객들은 거의 연금 생활자인 연세가 있는 분들이다. 46년 만에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높은 수준으로 물가가 오른 일본의 한 단면이다.
2023년 1월 일본의 도시가스 요금은 작년 같은 달과 비교해 35.2% 올랐다. 식용유 가격도 31.7%, 전기요금 20.2%, 펫트용품 20.5%, 햄버거는 17.9% 올랐다. 작년 10월 4,892 품목의 가격이 오른 이후 올해도 가격 인상은 계속되고 있다. 가격은 그대로 두고 양을 줄여 실질적으로 가격이 인상된 상품까지 포함하면 가격이 오른 품목은 1만 5,813개로 늘어난다. 아베 전 수상은 물가를 올리고, 경기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공공사업을 확대하는 재정정책,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성장전략, 마이너스 금리에 무제한 돈을 푸는 양적완화 통화정책인 아베노믹스를 시행했다. 그때도 꿈쩍하지 않던 물가가 46년 7개월 만에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도쿄도東京都는 높은 물가에 생활이 어려워진 저소득층에게 쌀 25kg을 무상공급하기로 했다. 각 지자체들은 관할 상점들과 협업해 지역의 할인 쿠폰, 할인 상품권을 발매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들이 일시적, 한정적이다 보니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높은 물가를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은 오롯이 서민의 몫이다.
경기가 나쁘면 식료품 구입비용부터 줄이는 일본인
경기가 나쁘면 식료품 구입비용부터 줄이는 일본인
일본인들은 경기가 나빠지면 제일 먼저 식료품 구입비용부터 줄인다. 양을 줄일 수는 없으니 싸게 구매하는 방법을 찾는다. 같은 상품이라도 마트마다 판매하는 가격이 다르고, 마트마다 다른 마트보다 더 경쟁력이 있는 상품이 있다. 노련한 주부들은 그런 정보를 잘 알고 있다. 가족수가 많지 않은 시민들은 마트의 할인코너나 주변의 디스카운트숍을 주로 이용한다. 가족수가 많은 가정은 업무용 마트業務用スーパー를 곧잘 이용한다. 업무용 마트는 본래 식당 등 업소를 대상으로 하는 대량포장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지만 일반인들도 이용할 수 있다. 만두 3kg, 땅콩도 5kg 등 대용량 포장으로 판매하니 당연히 일반 마트보다 판매 단가가 낮아진다. 도쿄 시내 외곽에는 이런 업무용 마트 여러 곳이 성업 중이다.
대형마트가 자체 개발한 PB private brand 상품도 인기가 높아졌다. 대형 마트가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기획하여 메이커와 협업해 생산하니, 중간 마진이 없어지고 당연히 가격이 낮아졌다. 유명 브랜드상품은 아니지만 품질, 외관, 맛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예전에는 PB 상품은 저가품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오히려 대기업이 기획한 것이라 더 신뢰할 수 있다는 고객이 늘었다. 일본 최대의 마트, 이온사의 PB상품 톱밸류, 이토요카도의 세븐 프리미엄 등 대형 마트들은 식품에서부터 화장품까지 다양한 상품들을 PB로 저가에 공급하고 있다.
마트의 할인코너도 서민들이 높은 물가 탈출구 중 한 곳이다. 일본의 마트, 백화점의 식품관에서는 당일 판매되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 도시락, 생고기, 생선 등 신선식품, 반찬류는 시간대별로 값을 할인하여 판매한다. 업체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일정시간이 지나면 정상가의 10% 할인부터 시작하여 20%, 40%로 점차 할인율을 높이고, 폐점 직전에는 반값으로 할인 판매한다. 오후 늦게 만든 빵 등 식료품은 다음 날 아침 반값으로 내놓기도 한다. 이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구매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일본의 편의점, 마트에서는 원플러스원, 투플러스원 방식의 세일은 하지 않는다.
가격이 싼 국산 식재료의 일식을 먹자
높은 물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극복방안 정보 공유도 눈에 띈다. 가계家計 컨설턴트 요코야마 미츠아키横山光昭 씨는 양식보다는 일본식으로 먹을 것을 제안한다. 빵, 치즈, 올리브 오일, 와인, 파스타 등 수입 식재료를 사용한 양식은 재료비가 많이 올랐지만, 쌀, 된장, 간장, 낫토, 두부 등 수입하지 않은 일본산 식재료는 비교적 값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90% 이상 수입에 의존하는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만든 빵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으로 주택비용, 핸드폰 사용료 등의 고정비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새로운 회계연도가 시작되고, 학생들이 입학하는 4월에 일본에서는 ‘신생활新生活’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국인 유학생도 많은 도쿄고교대학東京工業大学 학생들은 지난 4월 의미 있는 신입생 환영 행사를 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졸업생에게는 필요 없게 된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과 가구 140여 점을 모아, 닦고 청소하여 높은 물가로 어려운 환경에서 신세이카츠를 시작하는 신입생에게 물려주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께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구매하면 가격이 10% 이상 싸지는 공동구매 앱도 카우쉐 カウシェ의 다운로드 수도 138만 회로 작년보다 두 배 늘었다고 한다.
만성 디플레이션에서 급성 인플레이션을 맞이한 일본 경제
일본의 물가가 이렇게 급하게 오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글로벌 원재료 가격 상승과 엔화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이번 글로벌 원재료 가격 상승은 구미로부터 시작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이탈했던 구미의 노동자들은 아시아보다 먼저 코로나가 끝났지만 직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상품의 공급이 부족해지고, 또 장기화되면서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 여파는 아시아까지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LNG, 밀가루 공급이 부족해지며 일본에서도 수입품 가격이 오르며 다른 물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2년 1월 달러 당 115엔이었던 일본의 환율은 10월 150엔으로 1.3배 올랐다. 작년 1월 1달러짜리 미국산 밀가루를 115엔에 수입해 올 수 있었지만, 10월에는 150엔을 내야 했다. 환율 때문에 같은 물건의 값이 몇 달 사이데 30%나 오른 것이다. 달러 환율은 아직도 135엔대로 작년 초와 비교하면 20%나 오른 상태이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주도형 경제구조인 일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지만, 글로벌 경기 악화로 수출이 둔화되어 엔저의 환율 효과도 누리지 못했다. 엔저는 수입 물가에는 직접,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곡물, 식용유 등 국민생활과 직결되는 수입 원자재는 작년과 비교해 20~30% 가격이 올랐다. 한국산 제품을 수입하는 天仁네 회사도 달러로 거래하는 IT 부품 등 기업형 제품에는 영향이 없지만, 일반 시민들이 사용하는 생활용품은 가격을 맞추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겼고 있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이었던 일본, 흔히 ’ 잃어버린 20년, 30’년으로 표현하듯이 일본은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을 겪어 왔다. 2022년 물가 상승률을 감안한 일본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3만 5,385달러로 전 세계 28위로 떨어졌다. 아베 정권이 시작된 2012년 4만 8,633달러에서 무려 13,248달러나 떨어져, 아베 집권 기간 엄청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일본은 물가가 매우 낮은 나라였다. 2022년 7월 세계 각 나라의 물가 수준을 나타내는 빅맥 지수는 미국보다 2.32달러 낮은 세계 41위였다. 20년 전 5위로 12위의 미국보다 높았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물가가 싼 나라가 되었다. 天仁의 다른 글 <물가가 오르지 않으면 살기가 좋은 것일까?>에서도 다룬 적이 있지만, 지나치게 낮은 물가상승률은 경제가 활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일본 소비자들은 상품의 가격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품 가격을 올리면 소비자들이 외면하니 오히려 기업의 적자가 커져 상품 가격을 올리지 못했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임금도 올려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소비가 둔화되고 물가가 오르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른바 ‘재패니피케이션(일본화)’이라는 ‘저성장, 저인플레, 저금리’가 장기화되었다.
문제는 이런 장기 간의 디플레이션 후 찾아온 갑작스러운 인플레이션을 어떻게 이겨 나갈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정체된 임금과는 달리 물가만 오르니 근로자들의 생활이 팍팍해졌다. 그러자 기시다 정권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임금을 올리기는 시작했다. 유니클로가 연봉의 40%를 인상하고, 캐논 등 대기업들의 임금 인상 발표가 경제신문의 톱기사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민들이 느끼는 생활고는 곧바로 해소될 수가 없다. ‘가격 인상은 NO’ 라던 소비자들의 강한 거부감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기업들이 임금을 올린다고는 하지만 중소기업들에게는 임금인상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전체 노동자의 약 7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경영체질이 허약하고, 값이 오른 원자재 가격을 원가에 반영하여 대기업에 납품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후생노동성은 홈페이지에 ‘임금인상 특별페이지’까지 만들었다. 이번에는 중소기업까지 임금을 올릴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서민들도 급성 인플레이션에 대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일본 국민들도 이제는 상품 가격이 인상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바로 잡지 못하면 일본 경제가 파탄 나고, 소로스의 예상처럼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